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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소식 [뉴스레터] 배용균 감독이 파주로 간 까닭은? | 2020.02.20 | 9003 |
‘은둔자’, ‘시대의 걸작을 남기고 사라진 예술가’로 불리는 배용균 감독이 지난 1월 파주보존센터에 등장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과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 단 두 편의 영화만을 만든 뒤 홀연히 영화계를 떠나 갖가지 추측과 소문만 무성했던 그가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자료원) 파주보존센터 색재현실에 매일 출퇴근한다는 이 믿기 어려운 소식에 모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귀환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하 <달마…>)의 디지털 복원을 위한 기술 자문 때문이다. 괴력의 1인 제작 방식과 4년에 걸쳐 제작된 걸작의 복원이 시작되다! 1989년 배용균 감독은 <달마…>로 제4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는 것은 물론 같은 해 제42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표범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화는 동자승 해진, 속세를 등지고 출가한 젊은 스님 기봉, 해탈의 경지에 이른 노스님 혜곡을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고찰을 완벽한 구성과 화면으로 담아 국내외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제작, 감독, 촬영, 각본, 미술, 편집 등을 감독 혼자 감당한 괴력의 1인 제작 방식과 무려 4년에 걸친 제작 과정이 알려지면서 그의 완벽주의적 면모는 더욱 큰 화제를 모았고, 여전히 전설처럼 회자되곤 한다. <달마…>의 복원 여정은 약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디지털 복원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 외로 많은 공정과 시간이 투여되는데, 그 과정 중 감독과 주요 스태프의 기술 자문은 복원의 구체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자료원에서는 그동안 많은 작품의 디지털 복원을 진행하며 해당 작품의 감독과 스태프를 모셔서 기술 자문을 구했다. 특히 <달마…>는 배 감독이 영화의 전 과정을 직접 담당했기에 감독의 기술 자문은 필수적이었다. 이메일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루트로도 감독에게 접근할 수 없었기에 약 2년 전부터 그에게 여러 차례 이메일을 보냈고, 드디어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우선 디지털 복원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보존 중인 필름을 디지털 스캔했다. 자료원에서 보존하고 있는 필름은 오리지널 네거티브 1벌과 마스터 포지티브 1벌, 그리고 릴리즈 프린트 5벌. 필름들을 디지털 스캔한 후, 작년 9월에 감독을 처음으로 파주보존센터로 모셨다. 감독은 근 30년간 <달마…>라는 작품이 겪었던 풍파에 대해 하소연했다. 국내외에서 비상한 관심을 끈 영화를 찾는 곳은 많았다. 하지만 당시 한국영화계와 영화산업은 영화가 ‘감독의 작품’이라는 의식보다는 ‘제품’이라는 의식이 더 지배적이었고, 영화는 감독이 모르는 새 조악한 화질과 색감, 맞지 않는 화면비로 여러 차례 DVD 등으로 출시되었다. 하나의 씬을 위해 몇 날, 몇 개월, 또는 1년을 기다려 한 장면 한 장면을 고심하여 완성했던 그에게는 이런 일들은 큰 상처로 남았다 했다. 이번 자료원에서의 디지털 복원이야말로 단순히 아날로그 필름으로 촬영되었던 <달마…>를 디지털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형태의 <달마…>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라 했다. “기봉의 승복 색이 추한 회색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계곡 물살의 색이 더욱 힘이 느껴졌으면 합니다” 여러 필름 중 배용균 감독이 가장 정본(正本)이라 생각되는 마스터 포지티브 프린트의 편집을 기준으로 오리지널 네거티브에서 몇십초의 분량을 추가해 최종 편집본을 완성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판본으로부터 최종본을 결정하는 일부터, 감독이 과거에 직접 작업했다는 영문 자막을 다시 손보는 일까지 우여곡절은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이 모든 의사소통 역시 이메일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했기에 편집본을 보내고 확인받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야 했다. 약 4개월 만에 파주보존센터를 다시 찾은 배 감독은 잠시의 휴식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색재현실에서 말 그대로 아침 출근, 저녁 퇴근을 했다. 복원작의 색재현의 경우 이미 개봉된 영화의 원색을 찾는 작업이기에 보통 1~2일 정도에 마무리되는 데 반해 그는 한 장면, 한 장면을 허투루 놓치는 일 없이 보고 또 보았다. 선불교의 사상을 담은 영화만큼 그의 디렉션 역시 종전의 작업 방식과는 달랐다. “승려복의 회색이 너무 추하다”, “계곡 물살이 더욱 힘이 느껴지는 색이었으면 한다”, “마룻바닥이 너무 날라 보여 공허하게 비추어진다”, “하늘의 빛깔이 여름 날씨의 느낌이어야 한다” 알 듯 모를 듯한 그의 디렉션에 컬러리스트의 고심은 몇 배로 커졌다. 이번 색재현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으로는 인물의 피부 톤은 감홍시 색으로 방향을 잡았으며, 전반적으로 보라색 계열의 색은 녹이 슬어 보인다는 감독의 의사에 따라 되도록 지양하는 쪽으로 전체적인 색감을 잡아 나갔다. 일주일이면 끝나리라 예상했던 색재현 작업은 그 뒤로도 한 주를 더 거쳐 마칠 수 있었다. 물론 이로써 디지털 작업이 모두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영상 복원이 아직 진행 중이고, 감독이 직접 제작한 5.1채널 음향에 대한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하며, 이 모든 과정 이후에는 외국어 자막 및 색상의 최종 확인 등 아직 긴 여정이 남아 있다. 이번 색재현 작업으로 훼손된 필름과 세월의 더께로부터 해방되어 <달마…>는 잃었던 색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배용균 감독의 원래 뜻대로 구현된 <달마…>는 이미 여러 차례 영화를 만났던 관객에게조차도 어쩌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일지 모른다. 조악한 VHS와 DVD, 스크래치로 가득한 필름으로 보았던 혹은 전설처럼 구전되어 오던 걸작 <달마…>를 깊이 있는 색과 선명한 화면으로 만날 날이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