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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뛰어넘은 시네필 커뮤니티에 대한 탐구와 애정 2024.04.26 11767

시간을 뛰어넘은 시네필 커뮤니티에 대한 탐구와 애정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을 기획한 황민진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래머
& 90년대 시네필 김형석 춘천영화제 운영위원장의 대담

글 | 남선우(씨네21 기자)          
사진 | 김승율(씨네21 객원 사진기자)


  
(좌) 김형석 춘천영화제 운영위원장 / (우) 황민진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래머

루치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1947) 스틸 옆에 한국어로 된 연서가 적혀있다. “우리는 영화라는 이름으로 모였으며 언제나 영화를 생각하고 있다고 감히 이야기합니다.” 뒤를 잇는 건 대범한 선언이다. “언제나 수동적으로 영화를 바라보며, 동일시와 소외 속에서 숨막혀있는 한국의 불행한 관객들을 위해 우리는 ‘새로운 영화읽기의 제안’이라는 거대한 화두로 도전합니다.” 두 문장은 1996년 발간된 <문화학교 서울 카탈로그>에 기록된 ‘창립취지’의 일부다. 90년대 시네필 문화의 교두보였던 각지의 시네마테크는 이렇게 ‘불행한’ 세태에 맞서 영화로써 결기하는 장소였다. 여러 금기와 혼란 속에서, 스스로도 ‘거대하다’고 자부할 만큼 부풀어 있던 꿈이 연대를 가능케했다.

그 온기를 체험해볼 수 있는 자리를 시네마테크KOFA가 준비했다. 5월14일부터 열리는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 기획전에 앞서, 관람 전 지도가 되어줄 대담을 여기에 덧붙인다. 지난 4월 9일, 90년대생으로서 90년대 문화를 살핀 시네마테크KOFA의 황민진 프로그래머, ‘문화학교 서울’을 거친 당대 시네마테크의 산증인 김형석 춘천영화제 운영위원장이 함께했다. 세대를 잇는 두 영화광의 대화는 탐구와 추억을 넘어 동시대 시네필 커뮤니티를 향한 안부 묻기로 나아갔다.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 기획전은 어떻게 출발했나. 

황민진
/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은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래머로서 맡은 제 첫 기획전이다. 첫 기획전을 어떻게 꾸릴지 고민하다보니 ‘시네마테크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이 떠올랐고, 이전에 수집 담당으로서 조사한 90년대 시네마테크 자료를 다시 찾아봤다. 자료를 파고들수록 90년대에는 어떻게 이렇게 영화에 대한 광적인 애정을 집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는지 호기심이 커졌다. 이런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90년대의 시네마테크를 지금의 극장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래밍에 있어서는, 과거 재현에 그치지 않고 지금 시네필과의 만남을 통해 시네마테크의 현재적 의미를 이야기해보는 담론의 장을 만들어보고 싶어 이렇게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


90년대 시네마테크를 직접 경험해본 김형석 위원장은 자료원에서 이런 기획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남다른 기분이었을 듯하다.

김형석
/ 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특히 상영을 위해 작품을 구하던 과정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국내에 정식 출시도 안 된 영화를 어떻게든 구해 보는 것이 중요했다. 어렵게 구한 원본에서 복사본을 만들고, 조잡한 프로그램을 사다가 자막을 입히고, 그렇게 만든 상영본을 다시 복사해서 전국의 시네마테크에 보냈던 과정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VHS 테이프에 담긴 좋지 않은 화질의 영화들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보곤 했다. 이번 기획전은 그 시절 시네마테크에서 열화된 화질의 비디오로 시력 테스트 하듯 겨우 영화를 봤던 수많은 시네필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특히 전 작품을 필름으로 상영한다는 점에서, 당시 절대 필름으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영화들을 필름으로 만나는 감동이 있을 것이다.
 

 
영화로 숨어든 이들의 연대
 
  
90년대 시네마테크의 각종 소식지
(김형석 위원장 소장자료)
 
한국의 시네필 문화는 1970년대 프랑스•독일문화원으로부터 태동했다고 알려졌다. 앞선 세대와 구별되는 90년대 시네필 문화만의 특징을 듣고 싶다.

황민진
/ 먼저, 일반적으로 한국의 시네필 문화가 1970년대 해외문화원으로부터 태동했다고 이야기되지만 이름을 남기지 않고 집단화되지 않은 수많은 영화광들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라 본다. 90년대 자료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관객들이 80년대의 ‘열린영화’ 논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아가 ‘새로운 영화 읽기’라는 제언, ‘영화로 세상보기’라는 광주 시네마테크 이름과 같이 영화를 주체적으로 읽어내고, 직접 만들기도 하는 등 관객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편의상 10년 단위로 세대를 분류했지만 이전 시대와 단절하지 않고, 80년대의 영화운동적 성격이 관객 수용 운동으로 이어진 점이나 민족•민중영화운동 단체와도 연대를 지속한 점이 90년대의 특이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영화공간1895’의 경우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상인, 1991) 상영 직전 16mm 필름을 압수당하고, 이에 저항하던 운영진이 연행되기도 했다. 언뜻 보면 90년대 시네마테크는 80년대 영화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평화롭게 영화를 향유했던 시기로 비춰지는데, 부산, 대전 등 지역 시네마테크를 보아도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상인 감독이 회고했듯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상영 공간을 내어주고 공권력에 함께 맞섰던 시네마테크 운동의 역사도 공존하는 것이다. 직접 그 시대를 겪은 김형석 위원장은 당시를 어떻게 조망하는지 궁금하다.

김형석
/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한국 시네마테크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이라기보다는 90년대에 ‘문화학교 서울’에서 4년 동안 일하며 겪었던 개인적인 기억들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90학번인데 입학했을 때 학교에 여전히 운동권 문화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동구권 몰락 이후 조금씩 달라지는 분위기였다. 문화의 시대였고, 마르크시즘 대신 성 정치학이나 푸코와 들뢰즈 등의 이론이 유행이었다. 그리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네마테크에 모여들어 영화를 보았다. 그들은 비디오 대여점을 돌며 ‘숨은 비디오 찾기’를 했고, MBC 라디오 프로그램  
< 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 > 들으며 정성일 평론가의 방송분을 녹음하기도 했다. ‘으뜸과 버금’이나 ‘영화마을’같은 비디오 체인점도 일종의 시네마테크 역할을 했다. <키노>나 <씨네21> 같은 잡지가 창간되었고, 부산국제영화제와 부천국제영화제가 시작되었다. <희생>(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 같은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광의 시대였다.

그렇다면 당대 한국영화계는 시네마테크 문화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나.

김형석
/ 한국영화는 1990년대에 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대신 시네필들은 왕가위나 레오스 카락스나 짐 자무시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같은 외국의 작가 감독들에 열광했다. 하지만 2000년 이후엔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열리는데, 그 주역들은 모두 시네마테크 문화를 경험한 마니아들이었다. 시네마테크 효시인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센터를 거친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최근 다큐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이하 '노란문')>(이혁래, 2023)로 알 수 있듯 봉준호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류승완 감독이나 김지운 감독도 그랬다. 90년대 시네마테크의 감수성을 공유하는 영화광 감독들이 2000년대에 한국영화의 메인 스트림 안에서 성과를 내고, 그전까지 외화에 열광했던 세대들이 한국영화로 흡수되기 시작한 셈이다. 문화학교서울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서식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한국영화계 이곳저곳에서 일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났던 장건재 감독, <시인의 사랑>(2017)을 만든 김양희 감독을 비롯해 영화과 교수, 프로듀서, 평론가, 영화제 프로그래머, 현장 스태프 등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때 그곳에서 만났다.

황민진
/ 이번 기획전 아트 디자인을 맡은 ‘스튜디오 빛나는’의 박시영 대표도 문화학교 서울 출신이라며 반가워하셔서 신기했던 기억도 난다. 한국 영화계를 구성하는 영화인의 상당수가 당시 다양한 시네마테크를 거쳐 성장했다는 것을 새삼 체감한다.

김형석
/ 드러나면 안 되지만 다들 알고 있는, 전국적으로 시네마테크라는 거대한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중에서 내가 경험한 문화학교 서울은 나름 시스템을 갖췄는데, 이건 전적으로 대표님 덕분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최정운 대표님은 한의사였다.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문화학교 서울이라는 공간을 만드셨고, 사재를 털어 그곳을 유지하면서 영화를 사랑하는 청년들을 후원하셨다. 당시 시네마테크는 법적으로 업종 등록 코드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학원업으로 등록했고, 그러면서 ‘문화학교 서울’이라는 이름을 붙이셨는데, 초창기엔 진짜 학원처럼 연기(판토마임) 수업도 하고 영화 제작 수업도 했다. 이후엔 시네마테크로서 집중했고.

황민진
/ 작년에 <노란문>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로 나왔지만, 이런 이야기가 극영화로 나와도 재밌을 것 같다.

김형석
/ 어쩌면 <노란문>은 빙산의 일각이다. <노란문>에 등장하는 지도처럼, 서울 전 지역에 여러 시네마테크와 영화 단체들이 있었고 마니아들은 그곳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보고 활동을 했다. 돌이켜보면 90년대 시네마테크에는 70년대의 엘리트적인 영화광 문화, 80년대의 운동으로서의 영화가 모두 섞여 있었다. 예술영화뿐만 아니라 독립영화와 영화 운동 차원의 기획도 함께 있었다. 그런 감수성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것들이 모두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걸리면 안 되는 일들을 좋아서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상황이 주는 연대 의식이 컸다.


서울 외 지역 시네마테크, 영화 단체 문화를 살피며 눈에 띈 지점도 있었나.

황민진
/ 서울보다 소수 정예로 운영된 곳들이 많다. 한두 명이 지역을 대표하는 단체를 끌고 나갔던 기록들을 보면 그 혈기에 감탄하게 된다. 대부분 지역 당 하나의 시네마테크가 존재한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대구의 경우 특이하게 복수의 시네마테크가 공존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영화언덕’에서 이어진 ‘제7예술’과 ‘씨네하우스’가 공존하면서 서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다가 ‘아메닉’으로 합쳐진 흐름이 눈에 띄었는데, 그 과정에서 직접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도 하고, 대구여성영화제를 공동 주관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사실 이번 기획전에서 이진이 작가의 <인서트 코인>(1993)이나 야마가타 트윅스터로 활동하는 한받 감독의 작품같이 시네마테크의 일원들이 직접 제작한 영화를 상영하고 싶었다. 인디스토리 곽용수 대표가 연출한 <새가 없는 도시>(1996)나 김형석 위원장이 출연하기도 한 여러 영화들을 꼭 상영하고 싶었는데, 여러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국 틀지 못해 아쉽다. 혹시 이 때 배우로 출연한 영화에 대해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

김형석
/ 아는 사람들이 영화 만들 때 “배경이 좀 비어 보이니 그냥 와서 서 있어 달라”라고 부탁하면 가서 서 있곤 했다. 나름 연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어 보여서 선생님 역할로 자주 출연했다. (웃음) 문화학교 서울 출신인 손태웅 감독(현 서울예술대 교수)이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연출한 <필통 낙하 시험>(1997)도 그런 작품인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나중에 봤더니 내 목소리를 아카데미 동기인 봉준호 감독이 더빙했더라. 그렇게 이런저런 작품으로 10편정도 출연한 것 같다.
 
 


영화의 세월을 담은 필름 상영

 

(좌) <커피와 씨가렛> 1996년 대전 상영 당시 필름 캔
(우) <감각의 제국> 필름 검열 흔적
 

 
이야기가 나온 김에, 황민진 프로그래머에게 이번 기획전 상영작을 선정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듣고 싶다.

황민진
/ 가장 먼저 90년대 시네마테크의 간행물, 리플렛, 회의자료와 같은 1차 자료와 당시 기사, 논문, 구술자료 등을 참고하여 정전이 된 영화들뿐 아니라 제3세계 영화, 컬트 영화,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단편 영화를 포함한 200여 편 정도의 리스트를 정리했다. 다음으로 각 시네마테크에서 중복 상영되었던 화제작들을 정리하고, 필름 상영이 가능한 작품을 확인한 후 판권 협의 과정에서 또 작품을 추리다보니 지금의 상영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상영이 여의치 않아 아쉬움이 남은 작품들도 있지만 감사하게도 시네마테크에서 활동하셨던 분들과 자료원의 필름 보존•영사 담당자분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주요 작품들의 상영을 확정할 수 있었다. 


자료원 관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상영작을 꼽는다면.

황민진
/ 모든 상영작을 추천하고 싶지만, 먼저 1995년 동숭시네마테크 개관작이었던 <천국보다 낯선>(1984), <커피와 씨가렛(커피와 담배)>(1993)을 꼽고 싶다. 짐 자무쉬 감독의 거칠고 투박했던 초기작으로, 선명하지 않은 부분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필름만의 질감과 물성에 잘 어울리는 두 작품이다. 두 편 모두 90년대 상영 당시 35mm 필름으로 영사할 예정이며, <커피와 씨가렛> 필름은 수입사 백두대간 이름이 박혀있는 역사적 사료이기도 하다. 어제 스틴백(steenbeck)으로 <천국보다 낯선> 프린트를 확인하다가 마지막 사운드트랙 ‘I Put A Spell On You’를 필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듣는데 정말 황홀했다. 필름 영사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분들께도 권하고 싶은 상영작으로, 깨끗한 복원화면이 아닌 영화의 세월이 담긴 필름 상영의 맛을 체험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김형석
/ 이번 상영작 리스트를 보면서 90년대 시네마테크에서 사랑 받았던 영화들을 새삼 떠올렸다. 나름 ‘흥행’(?)을 기준으로 보면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가 A라면 <감각의 제국>(오시마 나기사, 1976)이나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1971) 등이 A+였고, 짐 자무쉬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나 피터 그리너웨이 같은 감독들이 사랑 받았던 시기였다.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덜했지만, 그래도 <화분>(하길종, 1972),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장호, 1988), <만다라>(임권택, 1981) 같은 작품을 틀고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게 기억난다.

황민진
/ <화분>은 이번 기획전 상영작이기도 하다. 70년대 개봉 당시 <테오레마>(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1968) 표절시비로 격하되었던 <화분>을 영화공간1895와 문화학교서울에서 재조명하고자 한 기록들이 눈에 띄었다. 외화뿐 아니라 이전 세대 한국영화를 재발견하고자 했던 꾸준한 노력들이 엿보였는데, 한국영화에 대한 90년대 당시 시네마테크의 분위기는 어땠나.

김형석
/ 문화학교 서울엔 ‘비상구’라는 이름의 한국영화 연구팀이 있었다. 임권택 감독이나 이장호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과거 한국영화를 공부하기도 했지만, 당시 개봉한 한국영화를 같이 보고 토론했다. 그리고 1994년엔 그해 개봉한 한국영화에 대해 각자 영화평을 쓰고 모아서 <한국영화 비상구>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푸른영상’ 등이 제작한 독립 다큐멘터리나, 16mm 단편영화들을 틀기도 했고, 1996년엔 독립영화제인 ‘인디포럼’을 만들었다.

황민진
/ 아까 잠깐 언급했듯이 영화 상영본을 구하는 것이 관건이었을 텐데 어떤 루트로 자료를 구했는지, 다른 지역 시네마테크와는 어떻게 상영본을 공유했는지 궁금하다.

김형석
/ 다양한 루트로 영화들을 모았다. 회원 중에 승무원이었던 분이 뉴욕의 ‘킴스 비디오’에서 영화를 사다 주시기도 했고, 어떤 회원은 소장하던 LD(레이저 디스크)를 빌려주기도 했다. 한 번은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곽용수(현 인디스토리 대표) 씨가 일본에 가서 구해오기도 했다. 다른 시네마테크와 테이프를 주고받을 땐 주로 고속버스 택배를 이용했다. 터미널에 가서 영화를 보내고, 상대 쪽에 몇 시 몇 분 어느 고속 차로 내려간다고 전화해주면 그쪽에서 시간 맞춰 터미널로 나가 테이프를 픽업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VHS 테이프를 빔 프로젝트로 쏴서 영화를 보는 방식은 곧 한계에 부딪혔고, 최정운 원장님은 사당동에 있는 어느 동시상영관을 인수해서 필름 시네마테크를 할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아트시네마가 생겼고, 문화학교 서울의 인력들이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1990년대까지 비디오 문화가 주류였지만 잠깐 LD가 등장하기도 했고 이후 DVD와 온라인을 이용한 VOD와 최근 OTT까지 정말 짧은 시간 동안 정신없는 변화가 있었다. 내가 경험한 시네마테크는 1990년대에 5~6년 동안 불사르듯이 번성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처럼 기획전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전제했을 때 더 깊이 감상할 수 있는 작품도 있을 듯하다.

황민진
/ <감각의 제국>(오시마 나기사, 1976)을 꼽고 싶다. 1998년 일본 문화가 국내에 개방되면서 비디오테크의 전설이었던 <감각의 제국>도 개봉 기회를 잡았다. 문화개방은 했지만 여전히 검열이 존재하던 시기였기에 당시 개봉 필름과 지금의 감독판이 어떻게 다른지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현재 넷플릭스에 공개된 감독판에선 대문짝만한 원판 모자이크가 들어간 장면이 상영 프린트에는 그대로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반대로 감독판에는 있는데 프린트에서는 삭제된 장면도 있다. 당시 모자이크 편집을 위해 네가 필름 자체에 열을 가했던 것이 미학적이기도 하고, 수위 조정을 위해 다른 종류의 필름이 섞여 있는 점, 자막이 현재와 미묘하게 다른 점도 흥미롭다. 영화 자체만으로도 이야기할 것이 많은데다 최근 해외 학계를 중심으로 미복원판(unrestored version)에 대한 관심이 늘어 당시 어떤 부분을 예민하게 생각하고, 검열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다른 상영작 중에서는 90년대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인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1962)가 있다. 1995년 5월 <키노> 창간호에서 ‘영화공간1895’를 소개하면서, “고다르의 손자손녀처럼 영화를 본다”는 대목이 너무 재밌었다. 지금도 그 의미가 거대한 고다르가 그 당시 영화광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궁금하다.

김형석
/ 당시 영화 청년들이 고다르나 타르코프스키 영화들을 많이 봤던 게, 당시 나오는 단편영화들 중 상당수가 고다르 풍이거나 타르코프스키 풍이었다. 어쩌면 시네마테크에서 본 영화들이 자신들이 만든 영화에 드러난 셈이다.

황민진
/ 마치 2000년대, 2010년대 한국 단편 영화들의 홍상수화 같은 느낌인가.

김형석
/ 맞다. 이번 기획전 상영작 중 한 편인 <노스탤지아>(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96)를 처음 접했던 때도 기억나는데, 엄청나게 안 좋은 화질이었고 관객은 엄청난 집중력을 동원해 많은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우며 영화를 봐야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나중에 다시 봤는데 화질 안 좋은 비디오로 봤을 때의 집중력이 안 생기는 거다. 당시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봤던 경험엔, 기묘한 아우라가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시대의 시네필을 향한 응원


 
키노 창간호 중 영화공간1895 소개글 부분  
 
90년대와 지금의 시네필 문화를 나란히 놓고 볼 때 어떤 차이와 변화를 발견하는지도 듣고 싶다.

김형석
/ 지금은 보고 싶은 영화를 한계 없이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시네필들의 커뮤니티는 약화되고 있는 것 같다. MBTI로 보면 당시 시네필들이 E 성향이라면 요즘엔 I 성향이라고 할까? 문화학교 서울엔 종종 영화 강좌가 있었는데, 당시 수강생들의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시네마테크에선 정기적으로 토론 프로그램이 있었고, 연구 팀에선 스터디를 하면서 논쟁하고 자신의 견해를 내세웠다. 매체 환경이 바뀌었고 90년대의 방식이 꼭 옳았다고 할 순 없지만, 지금의 시네필들은 외로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황민진
/ 요 몇 년 느낀 흥미로웠던 점은 누가 봐도 영화광인 친구들이 시네필로 호명되길 저어한다는 점이었다. 시네필이라는 명칭에 지나치게 무게감이 부여되는 한편, 온라인 외에 영화광들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만한 실체를 가진 공동체를 찾기 어려워서라고 생각한다. 나부터도 영화과나 영화산업에서의 경험 외에 단순히 영화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수십, 수백명이 하나의 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90년대 시네마테크가 가진, 경험해보지 못한 공동체성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것 같다. 언젠가는 일방향의 강의나 GV가 아닌, 관객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은데 익명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그런 자리를 원할지 모르겠다.

김형석
/ ‘넷플연가’같은 커뮤니티도 있고 SNS를 통해 서로를 북돋는 영화광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긴 하다. 지금 세대도 과거처럼 함께 모여서 공통 관심사를 나누고 서로 이야기하는 문화를 원하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 톤 앤 매너와 방식이 달라진 거겠지만.

황민진
/ 그렇다. 한편으로 이제는 영화적 경험에 있어서 극장 같은 물리적 공간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시네마테크가 특정한 장소를 거점으로 모였던 것과 달리 지금은 개인이나 단체가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고, 그에 따라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나누는 매체들이 생겨났다. 시네마테크KOFA의 경우는 더 많은 관객의 영화적 경험을 위해 온오프라인 모두를 아울러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있다. 상암동 극장 방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한 온라인 영화 채널, 반대로 온라인 환경에 익숙하지 않아 극장이 아니라면 영화를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오프라인 시네마테크를 모두 아우르고자 한다.
현재의 시네필 문화에 있어서는, 파편화되어 있긴 해도 팟캐스트, 웹진, SNS와 같은 여러 매체를 활용해 목소리를 내는 비평가들을 살펴보면 90년대와는 다른 지금만의 역동성이 있다고 느낀다. ‘카페 크리틱’, ‘회랑’과 같은 팟캐스트, ‘마테리알’과 같은 온오프라인 비평 플랫폼, <섭씨233>, <씬 1980>과 같은 지역 영화잡지, 대전 청년 영상 단체 ‘INK’, 웹진 <해파리> 등의 다양한 활동을 눈여겨보고 있다. 다루는 작품을 극장 개봉작에만 국한하지 않고, 운영주체도 영역도 층위도 가지각색이어서 하나로 통틀어서 말할 수는 없다는 점이 이들의 특징이다. 과거에 김홍준, 정성일 선생을 보고 자란 90년대 시네필처럼, 이들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시네필들이 양성될 것임을 알기에 항상 응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대담을 통해 90년대 시네마테크를 돌아본 소감을 묻고 싶다.

김형석
/ 90년대엔 영화가 문화 중심의 매체였다면 2000년대 이후 영화는 산업 중심의 매체가 되어버렸다. ‘영화 문화’라는 표현도 생소해졌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문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문화학교 서울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관객들이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오지만 나중에는 열정적인 회원이 된다. 시네마테크는 ‘만들어진 시네필’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 공간을 통해 점점 시네필이 되어갔고, 그 사람들이 ‘영화 쪽 일을 해볼까?’ 하면서 삶을 결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나도 그런 케이스였다. 지금 한국영화계에선 ‘포스트 봉준호’ 얘기를 많이 한다. 봉준호 감독은 아마 1990년대 식 시네마테크를 제대로 경험한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포스트 봉준호’ 세대의 영화적 경험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황민진
/ 90년대 시네필들이 영화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어렸을 적 클럽박스나 토렌트와 같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 희귀한 영화들을 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해적과 같이 영화 불법 다운로드를 해봤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시네마테크라고 이름 붙여진 물리적 공간에서 많은 이들이 함께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혼자 혹은 소수의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영화 감상 경험을 나눴던 나의 기억이 떠올라서 이런 집단적인 경험이 솔직히 부럽기도 했다.
 김형석 위원장도 언급했듯 90년대 시네마테크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와 연결된다. 언뜻 보면 역동적인 활기만 가득 했을 것 같지만, 90년대는 시네마의 쇠퇴가 이야기되던 시대이기도 하고, <부활의 노래>(1990)에 가해진 검열과 <파업전야>(1990), <어머니, 당신의 아들>(1991)과 같은 작품들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도 여전했고,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이 이어지는 등 충무로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영화광들이 모여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꽃피운 것이다. 영화계의 위기를 말하는 지금도, 어떤 형태로든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과 시네마테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또 다른 반등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이번 기획전을 통해 다양한 담론이 오가길 기대한다.

| 대담일: 2024년 4월 9일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 프로그램 노트 바로가기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