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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영화의 황금기와 쇠퇴 | 2024.05.29 | 1834 |
필리핀 영화의 황금기와 쇠퇴
필리핀 영화감독 닉 디오캄포가 소개하는 기획전 ‘필리핀 영화의 황금기 : LVN Pictures’
글 : 닉 디오캄포(영화감독, <이삭> <옛 마닐라의 기억> <섹스 전사들과 사무라이> <나와 인형놀이> 등 연출) 번역 : 최현수 (씨네21 객원기자) ![]() * 필리핀 영화감독 닉 디오캄포(Nick Deocampo) 대부분의 아시아 사회와 마찬가지로 필리핀인들은 가족을 개인적인 소속감과 자부심의 귀중한 원천으로 여긴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이 가족은 애정만큼이나 불화와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세 차례에 걸쳐 식민지화되었던 필리핀의 역사 속에서 등장한 필리핀 영화는 이런 현실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일본, 미국의 식민지 지배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여전히 인간의 유대감과 그 관계의 보루로 남아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될 프로그램 ‘필리핀 영화의 황금기: LVN Pictures’의 상영작들은 영화가 어떻게 가족을 바라보는가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코미디, 멜로 드라마, 판타지,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영화는 필리핀 가족의 형상을 재현한다. 필리핀 영화 산업이 황금기를 구가하던 1950년대는 가족에 대한 묘사의 특정한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다. 이는 필리핀 영화가 대중 오락이자 문화적 표현으로서 성숙기에 접어든 시기이며,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영향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였다는 점에서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이 시기의 영화들이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은 영화가 개개인의 서사에 영향을 주는 사회 사이의 강력한 연결점을 시사한다. 전쟁으로부터 등장한 영화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시기부터 필리핀 극장은 할리우드 영화가 강세였다. 3년간 일본군의 지배로 영화를 비롯한 오락물에 굶주렸던 관객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놓치지 않으려 영화관으로 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국 영화 산업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는 필리핀 영화들도 등장했다. 50년대에 들어서 자국 영화산업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고, 필리핀 영화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9개의 필리핀 영화사가 본격적으로 타갈로그어 영화 제작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1948년 107편의 장편 영화를 제작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948년 마닐라에서는 자국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의 주간 관객 수는 20만 명에 달했다. 이는 같은 기간 영미권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의 관객 수보다 5만 명 적은 수치에 불과했다. 필리핀 영화가 이렇게 좋았던 적은 없었다. 단지 관객들이 극장으로 돌아온 것뿐만 아니라 자국 영화가 질적으로 만개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필리핀 영화의 발전에서 외국 문화의 힘을 간과할 수 없다. 종전 이후 미군이 필리핀을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면서 필리핀 사회를 향한 미국의 영향력은 커졌다. 미국이란 존재는 필리핀 경제, 군사, 기타 사회의 여러 측면을 지배해왔다. 할리우드 영화의 인기는 필리핀의 문화와 예술, 특히 영화에 영향을 미쳐왔다. 할리우드가 필리핀 영화의 창의성과 미학성을 형성한 세 가지 방식은 바로 스튜디오 시스템, 영화 장르 그리고 스타 시스템이었다. 세 요소는 자국 영화의 전성기를 펼치게 된 중대한 물질적, 미학적인 바탕이 되었다. 이들은 내러티브 중심, 상업적 가치, 도피주의적 성격 등 오늘날까지 필리핀 영화가 이어온 기준점을 제공했다. 5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국 영화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시간을 지나오며 이러한 가치는 온전히 발현되었다. 스튜디오 시스템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스튜디오는 필리핀 영화의 자립을 위한 사업 모델이 되었고, 필리핀에서 영화가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된 결정적인 이유기도 했다. 스튜디오는 영화 제작을 위한 안정적인 자본을 조달했고, 배우와 제작진을 계약서에 따라 고용하기 시작했으며, 정기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할 수 있는 업무의 표준을 제공했다. 영화 장르는 자국 영화가 관객에게 대중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표현 수단이 됐다. 영화 장르는 코미디, 뮤지컬 및 여타 다른 영화적 분류로서 영화적 관습에 따라 고도로 체계화된 시각적 청각적 의미의 집합이다.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두렵게 하고, 흥분시키는 동일한 영화적 관습의 반복은 이러한 영화 상품을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시장을 형성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스타 시스템은 얼굴과 재능을 빌려 관객들의 애정을 얻는 배우들의 출현을 통해 영화를 대중화했다. 스타는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 외에도 배우를 상품처럼 취급해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판매하는 데 편리한 마케팅 전략을 제공했다. 할리우드로부터 파생된 스타 시스템은 필리핀에서는 무명 배우를 유명하게 만드는 자생적인 현상이 되었고, 일부는 인기를 이용해 공직에 출마하여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이번 프로그램은 스튜디오 시스템 시대에 제작된 영화들의 표본으로 LVN 픽쳐스를 조명하고 있다. LVN 픽쳐스는 스튜디오 설립자들의 성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L은 드 레온(de Leon)을, V는 빌롱코(Villongco)를, N은 나보아(Navoa)를 의미한다. 세 성씨를 딴 이름 뒤에는 회사를 이끌어왔고 후에는 동업자들로부터 지분을 사 온전히 자신의 스튜디오로 소유하게 된 전설적인 인물 나르시사 드 레온(‘시상 부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던)이 있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멜로드라마, 코메디, 판타지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장르인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나르시사 드 레온이 제작한 영화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 * LVN Pictures 스튜디오 로고 황금기의 도래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 파라마운트 등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를 본뜬 필리핀 영화 스튜디오는 일종의 영화 공장처럼 운영되어 대중 오락용 영화를 제작했다. 50년대 자국 영화 시장을 지배해 온 '빅 4'라고 불리는 네 개의 스튜디오는 저마다 다른 장르를 특화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LVN 픽처스는 코미디 영화, 삼파기타 픽처스는 멜로 드라마, 프리미어 프로덕션은 액션 영화, 레브란은 해외 개봉용 영화로 잘 알려졌다. 그들은 자국 영화의 연간 생산량의 90%를 담당했다. 필리핀 영화의 황금기는 각 스튜디오가 훌륭한 품질의 영화를 제작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튜디오를 벗어나면 영화 자본도, 스타 파워도 없는 독립 영화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영화로 돈을 버는 데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60년대에 스튜디오 시스템 붕괴로 4대 메이저 스튜디오가 문을 닫은 후, 독립 영화사들이 영화 산업의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하게 됐다. 미국 영화들을 흥행 성적으로 이길 수 없었던 자국 스튜디오들은 외국 영화를 모방하는 데 의존했다. 대중적인 트렌드를 빠르게 적용한 제작자들은 러브 팀(대중들에게 로맨틱한 커플로 묘사되는 한 쌍의 남녀 배우들 – 편집자 주), 정형화된 캐릭터, 기술 효과, 인위적인 플롯과 같은 할리우드 영화의 인기 공식을 따랐다. 필리핀 영화감독들은 유성 영화, 컬러 영화, 와이드 스크린 등 기술적 혁신을 빠르게 반영했다. 1950년 LVN 스튜디오는 자체적인 컬러 처리 실험실을 설치했다. 이를 통해 LVN은 다른 스튜디오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필리핀인들은 장르 영화에서 오락성을 발견했다. 1950년대에는 코미디, 멜로드라마, 판타지, 액션 영화, 뮤지컬이 인기를 끌었고, 연재 만화를 각색한 영화를 향한 고정 관객층이 증가했다. 필리핀에는 카우보이와 인디언이 없지만, 대중 영화는 단순한 오락을 위해 존 웨인 같은 카우보이 캐릭터를 모방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장르는 뮤지컬이었다. 삼파기타 픽쳐스는 1937년 스튜디오의 첫 작품인 카를로스 밴더 톨로사 감독의 뮤지컬 로맨스 영화 <아름다운 별>을 개봉했다. LVN 픽쳐스도 1939년 톨로사 감독의 <내 사랑>을 첫 작품으로 내세웠다. 필리핀 관객들은 뮤지컬 영화를 통해 일상에서 마주한 어려움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할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영화인 <내 사랑>(1939)은 노래로 성공하기 위해 도시로 향하는 시골 소녀가 진정한 사랑이 기다리고 있는 농촌으로 되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필리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또 다른 뮤지컬 영화는 <파시그 강의 뮤즈>(1950)다. 리처드 아베라르도가 감독한 이 영화는 파시그 강의 전설과 얽힌 한 여인의 고통에 관한 노래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 *<슬픔의 아이: 폐허>(1956) 스틸이미지 멜로드라마는 필리핀 영화의 저력이 가장 빛을 발하는 분야다. 50년대 작품 중에서는 람베르토 V. 아벨라나 감독의 <슬픔의 아이: 폐허>(1956)가 단연 돋보인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형식으로 영화는 전후 마닐라에 살던 사람들의 가난한 삶을 그려낸다. 한국전쟁의 참전 용사를 돕는 매춘부가 삶의 역경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1956년 홍콩에서 개최된 제3회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상을 포함하여 유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마누엘 사일로스 감독의 <대지의 축복>(1959)는 경작한 땅의 결실로 살아가는 부부와 자녀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다룬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견뎌내고 단단해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레고리오 페르난데스 감독의 <말바로사>(1958)는 가족의 가치라는 동일한 주제를 방황하는 다섯 형제와 삶의 방향을 잃은 어머니로 구성된 가난한 가족을 딸이 꾸려가는 내용으로 그려낸다. 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로 의지하며 살겠다는 유언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세 형제의 이야기를 멜로드라마 장르로 마무리짓는 <맹세>(1948)도 마찬가지다. 함께 지내기 위한 결속력을 유지하기란 각자의 삶을 살기 위한 노력 앞에선 어려운 과제로 남고 만다. 시대극은 관객들에게 매력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 이국적인 풍경, 현란한 의상, 화려한 춤사위는 시각적인 만족감을 선사했다. 기이한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람베르토 V. 아벨라나의 <바자오: 집시의 바다>(1957)은 필리핀 남부의 바닷가에 사는 유목민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영화다. 이교도 소년이 무슬림 가정과 결혼하면서 부부는 그들의 가족 그리고 부족들과 갈등을 겪게 된다. 이 작품으로 아벨라나는 1957년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비롯한 여러 상을 거머쥔다. 판타지의 작법으로 만들어진 빈센트 셀럼바이즈 감독의 <아다르나>(1941)는 병든 왕을 노래로 치유하는 전설의 새에 관한 동화를 풀어내고 있다. 왕의 세 아들은 새를 잡기 위해 각자 여정을 떠나고, 그 새를 잡는 사람이 왕국을 물려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티노 가르시아의 <세쌍둥이>(1960)는 같은 날 태어났지만 뿔뿔히 흩어져 서로 다른 가정에서 살게 된 세쌍둥이의 이야기를 담은 경쾌한 코미디 영화다. 영화 속 세 형제는 구두닦이, 복서, 성공한 사업가로 서로 다른 삶을 살다가 마침내 서로 만나게 된다. 언급한 모든 작품에서 가족은 소속감의 원천인 동시에 대립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휴먼 드라마에 푹 빠진 개인들은 가족 구성원들 간의 긴장 관계에 사로잡히게 된다. <맹세>와 <아다르나>에서 형제는 서로 다투며 음모를 꾸미는 관계이며, <바자오: 집시의 바다>에서 가족은 갈라서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모두 각각의 구성원들이 마주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묶어주는 유대감의 존재로서 가족을 바라본다. <대지의 축복>에서 자녀들은 부모를 거스르고, <말바로사>에서 개인주의는 가족을 갈라놓지만, <슬픔의 아이: 폐허>에서 낯선 이들이 서로를 끌어당겨 가족을 형성하는 것처럼 가족의 긴밀한 유대감은 불편한 관계마저 회복시킨다. 필리핀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작품들에서 포착할 수 있는 모든 극적인 사건들은 필리핀 사회에서 무엇이 필수적인 요소인가를 되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 필리핀 영화의 황금기는 변색하여 종말을 맞이하지만, 인간 감정의 프리즘 역할로서 가족은 변치 않는 인간 가치의 원천이란 사실은 여전했다. 경제 불황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은 필리핀 사회의 결속력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번 프로그램에 상영되는 영화는 황금기에 제작된 작품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나머지 세 영화사인 삼파기타, 프리미어, 레브란도 필리핀 영화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양질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LVN과 달리 상당수의 영화는 제대로 보존되어 아카이브되지 못한 채로 유실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 필리핀 영화는 50년대에 이르러 성숙기를 맞이했지만, 자국 영화의 급격한 성공은 지속될 수 없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황금기가 막을 내린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로 이는 다가온 10년간 필리핀 사회를 괴롭혔던 경제적 문제다. 필리핀 경제의 침체는 영화 산업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달러의 상승으로 제작자들은 영화 제작에 필요한 원자재를 구입하기 어려워졌다. 물가의 상승에도 변하지 않는 낮은 임금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가족들은 빈곤에 내몰렸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해외에서 더 나은 기회를 찾기 위해 조국을 떠났다. 도시에서는 도시 문제로 인해 인적 자원과 관계에 많은 부담이 발생했으며, 부패로 인해 정부는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영화는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라도 섹스와 폭력을 오락적으로 담은 영화를 보여줌으로써 필리핀인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인간적 고통을 반영했다. 역설적으로 필리핀 영화 관객들이 어려운 시기에 스크린으로 몰려든 이유는 아마 가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영화 제작량이 연간 300편을 넘어섰던 시기였지만, 양적 성장과 달리 이 영화들은 질적으로 엄청나게 떨어졌다. 60년대는 필리핀 영화가 저점을 찍은 시기였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자멸 직전에 처한 영화 산업은 스타 시스템에 의해 간신히 살아 남았다. 스타 배우들은 자신을 데뷔시킨 스튜디오와의 계약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프로듀서가 되었다. 그 결과로 영화의 편수는 증가했지만, 질적 저하가 발생하게 되었다. 품질 관리를 해줄 스튜디오가 없는 상황에서 스타들이 자신의 인기를 이용해 돈을 벌기 위해 만든 작품은 필리핀 영화의 지나친 산업화를 초래했다. 스타 배우들의 저력은 수많은 영화 팬을 끌어들여 영화 산업을 살렸지만, 값싼 스릴을 위해 섹스 영화, 카우보이 모방물, 제임스 본드 아류작,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쓸모없는 오락물이 제작되면서 산업의 질은 최저점에 이르렀다. 스타 시스템은 필리핀 영화 산업이 할리우드로부터 물려받은 특성 중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필리핀 사람들이 처음으로 영화를 만든 때부터 지금까지, 스타 배우들은 자국 영화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스타 시스템은 업계와 관객의 요구에 따라 세대마다 정의되고 재정의되었다. 독립 영화계에서 비전문 배우를 출연시키는 경우처럼 체계에 도전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스타 시스템은 필리핀 영화의 동의어처럼 여겨지며 지금까지도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계엄령, 잔치를 끝내다 60년대에 들어서 빈사 상태에 빠졌던 영화 산업은 1972년 페르난디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후 10년간 필리핀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는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50년대에 황금기를 보내며 필리핀인들의 가치관과 문화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던 영화는 검열과 국가권력을 통해 군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와해하려는 시도에도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던 가족은 계엄령 아래에서 국가와 파시스트 세력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하며, 가족 구성원들은 고통받고 사라지는 악독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영화계와 사회 모두 암울한 시기였지만, 리노 브로카 같은 젊은 세대의 영화인들이 등장해 새로운 필리핀 영화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폐허로부터 필리핀 영화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