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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된다면 <무사> 같은 도전을 또 하고 싶다.” 2024.06.20 2073
“기회가 된다면 <무사> 같은 도전을 또 하고 싶다.”
<무사> 4K 리마스터링 상영을 앞둔 김성수 감독 인터뷰 

글 : 김성훈(씨네21)
사진 : 오계옥(씨네21) 



<아수라>(2016)에 환장하고 <서울의 봄>(2023)에 답답해했던 ‘영화의 신’(김성수 감독) 광신도들에게 올해 부천은 <무사>를 큰 스크린으로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7월4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김성수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무사>(2001)가 4K로 다시 태어나 최초 공개된다. 
<무사>는 고려 말, 명나라 사신단으로 갔던 고려 무사들이 간첩 혐의를 받고 귀양길에 올랐다가 벌어지는 이야기다. 원나라 군사의 습격으로 명군은 전멸하고 사신단만 남았다. 고려 장수 최정(주진모)은 사신단이 계속해서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고 판단해 회군할 것을 명한다. 최정과 입장이 다른 부사 이지헌(송재호)은 자신의 호위무사 여솔(정우성)을 양인 신분으로 허락한다. 지칠대로 지친 사신단은 어느 객잔에서 명나라 공주 부용(장쯔이)을 납치한 원군과 만난다. 
한국 영화가 산업화에 접어들기도 훨씬 이전에 <무사>는 새로운 도전을 과감하게 시도했던 영화다. 해외 로케이션 촬영이 전무하던 시절, 제작진과 배우 등 500명이 넘는 사람들은 영화 속 사신단처럼  머나먼 중국 사막 한복판에서 5개월의 긴 여정을 버텨냈다. 중국 영화 산업이 지금처럼 성장하기 전에, 배우 장쯔이를 포함해 중국 스탭, 배우들과 공동 작업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기획부터 상영까지 약 4년 가까운 시간동안, 누구도 쉽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던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끌고 갔던 사람이 바로 김성수 감독이다. <서울의 봄>이 끝난 뒤로 신작을 준비하고 있는 김성수 감독을 만나 23년 전 연출했던 <무사>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 
 
4K 리마스터링 작업 때문에 오랜만에 <무사>를 보셨을텐데 어땠나.  
필름으로 찍은 영화인데 4K 리마스터링 작업을 해준 것에 대해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무사>는 한국영화로선 처음으로 호주 시드니에 위치한 사운드록 사운드디자인과 애틀랩(Atlab) 현상소에서 후반작업을 진행했었다. 사운드록은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 맥스> 1, 2편을 작업했던 유명한 녹음실이고,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를 책임졌던 애틀랩에서는 필름 스퀴즈가 된 슈퍼 35미리 현상 작업을 진행했다. 슈퍼 35미리는 아나모픽 렌즈로 필름의 사운드트랙 공간까지 꽉 차게(2.35:1) 영상을 압축(스퀴즈) 촬영하여 시네마스코프 사이즈(2.35:1)로 영사하는 방식이다. 
 
옛날 얘기를 나누고 싶다. <무사>는 <태양은 없다>(1998) 후반작업을 할 때 ‘여러 명의 남자들이 자그마한 대의명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이야기의 골조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있다. 당시 어떤 계기로 고려 말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연출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단편 영화 <비명도시>(1993)를 시작으로 장편 데뷔작 <런 어웨이>(1995) <비트>(1997) <태양은 없다>(1998) 등 <무사>를 찍기 전에 만들었던 영화 모두 도시에서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시의 후미진 밤 골목, 아니면 화려한 불빛의 대도시를 질주하는 이야기. 아마도 내가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괜한 반항심에 골목길을 배회하던 청소년기를 보낸 까닭에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 빠졌었던 것 같다.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 나는 ‘어떤 영화를 꿈꾸다가 여기까지 왔나?’라고 자문했다. 어릴 때 즐겨봤던 서부극이 떠오른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그게 과거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는, 샘 페킨파 감독의 <와일드 번치>(1969) <철십자 훈장>(1977)이나 존 스터지스 감독의 <황야의 7인>(1960) 같은 영화들인가. 
그렇다. 정통 서부극부터 수정주의 서부극까지 다 좋아했지만, 그중에서 샘 페킨파는 아주 열광했던 감독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서부극을 찍을 수는 없지 않나. 물론 장철 감독이 연출하고 왕우가 출연했던 무협영화 <외팔이> 시리즈도 좋아했지만, 영화계에 입문한 뒤로는 왠지 거리감이 생겼다. 영화 공부를 시작하고 알게 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1954),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사무라이의 반란>(1967) 같은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좋아했다. 나를 영화에 빠져들게 만든 전쟁영화, 서부극과 사무라이 영화 같은 전쟁 사극을 만들어 보자는 의욕이 생겼다. 고난에 빠진 어떤 집단이나 인물이 극한에 이르러 그들 인간성의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에 특히 매료되었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공포의 보수>(1953)처럼, 외부의 환란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인물들이 견지하던 일상의 태도가 무너질 때 ‘인간성의 진짜스러움이 분출’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렇듯 뭔가 대단한 포부를 품고서 <무사>가 출발한 셈이다. 다만, 하늘을 날면서 검술을 하는 홍콩 무협물은 취향과 맞지 않았고, 그보다 더 사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 사신단이 일본으로 갔던 기록을 역사 문헌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무사>는 처음에 중국이 아닌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서 시작한 건가. 
일본이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지를 염탐하려고 조선에서 수차례 사신단을 보냈다는 기록에서 힌트를 얻었다. 처음에 구상한 내용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간파한 사신단이 귀국하는 도중에 추격해 온 사무라이들과 죽기살기로 싸우다가 한 사람이 가까스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였다. 그때가 1999년 초엽이었고, 일본으로 가서 교토의 도에이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해외 합작 프로덕션의 준비와 제작 공정을 잘 몰랐고, 혼자 막무가내식으로 의욕만 가득 찬 상태였기에 일본 영화 관계자들은 내 원대한 계획을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는 일본영화계가 상당히 위축되어,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 대형 사극물을 거의 찍지 않을 시기였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후반부 영화인 <란>(1985)이나 <꿈>(1990)은 제작비가 어마하게 들어간 작품이지 않나. 
그 두 편은 유럽과 미국에서 각각 투자 받아 만들었으니까. 당시 일본에선 TV채널에서 사극 드라마를 만들고 있었지만, 대형 사극영화는 상당한 제작비가 요구되기 때문에 도전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2년 유럽에 머물 무렵 혼자 이집트의 사하라 사막을 여행갔던 기억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중국 서부 지역이 사막과 황무지라는 공간 배경과 겹쳐졌다. 고려 말 관련 서적을 읽다가 명나라 사신의 죽음을 해명하기 위해 고려 왕실에서 보낸 사신단이 여럿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당시는 원명 교체기라 혼란스런 외교 정국이었고, 사신단 대부분이 돌아왔지만 그중 한 팀의 귀국 후 기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모티프로 이야기를 만들면 되겠다 싶어 <무사>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도시 청춘 영화에서 벗어나 ‘어떤 영화를 꿈꾸다가 여기까지 왔나’라는 자문에서 출발 

20년 전에도, 지금도 고려를 배경으로 한 사극은 보기 드물지 않나. 올해 초 KBS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주목 받은 이유이기도 하고. 
당시는 역사 관련 서적을 즐겨 읽었다. 고려가 조선으로 넘어가는 고려 말기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됐던 ‘고려는 왜 꼭 조선이 되어야만 했나’라는 문제 제기 방식이 무척 흥미로웠다. 14세기는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각 지역의 주도권 싸움, 기술력의 발전과 국가 간 전파 등 국제 정세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고려의 쇠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신흥사대부가 유교에 기반한 정치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는 과정이 이해되지만, 왠지 고루한 사회 시스템으로 뒷걸음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고려말 여성들은 자유롭게 이혼과 재혼을 할만큼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승려들이 인도까지 가서 공부도 하고 표음 문자도 들여올 만큼 개방적이었다. <무사>에서 고려 사신단의 호위 군사는 용호군과 주진군으로 양분되어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호위 책임자인 최정 장군(주진모 분)이 이끄는 용호군은 고려왕실 부대인 반면, 진립(안성기 분)이 지휘하는 주진군(유해진, 정석용 등)은 군역을 치루기 위해 강제 징집된 일반 농민이었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인만큼 시나리오는 주인공 여솔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서사를 골고루 담아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꿈은 나름 원대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고려 사신단의 구성원은 14세기 고려사회의 축소판이다. 고려는 주변 열강 사이에서 눈치를 봐야 했고 정치적, 외교적 주도권을 갖지 못한, 딱 지금과 같은 형국이다. <서울의 봄>에서도 묘사되었지만 국가 위기 상황에서 중요 결정권을 가진 위정자들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입각하여 스스로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권력자들은 영화 속 주진군의 리더 진립(안성기)과 최정 장군의 부관 가남(박정학)처럼 극한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희생 정신과 용기를 갖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영달만 추구하는 자들임에도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맡기고 살아간다. 소속 집단 또는 국가의 위기시 진가를 발휘하는 사람들은 자기 신념의 일관성과 책임감을 장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훌륭한 성품을 가진 그런 분들은 온갖 술수가 난무하는 권력 게임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그래서 700년 전 고려의 비극은 오늘날 코리아의 비극으로 전승되지 않나 싶다. 

당시 제작자인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는 해외, 그것도 미지의 국가였던 중국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하는 프로젝트를 부담스러워 하진 않았나. 
내가 조감독, 차승재 대표가 제작 부장을 하던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다. <비트>와 <태양은 없다>로 오늘날의 나를 있게 만들어 준 가장 고마운 사람이다. 내가 <무사>를 제작하려던 그 무렵은 차 대표의 우노필름이 대형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그룹 싸이더스로 전환하는, 사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시나리오를 건넸더니 차승재 대표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주변 영화 동료들도 무모한 기획을 당장 접으라고 만류했다. ‘영화산업이 눈부시게 성장 중인 한국에서 강력한 영화를 찍어야지, 위험한 중국 오지로 들어가 왜 이런 걸 도전하느냐’며 혀를 찼다. 그러자 반대가 심할수록 외려 고집을 더 부리는 ‘내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했다. 당시 중국은 여행객도 많지 않았고 내부 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은 터라 내가 중국에 직접 가서 제작 가능성을 타진하겠다고 하니, 차 대표는 하는 수 없이 ‘갔다 오라’고 했다. 아마도 2~3주 머물다 돌아와 ‘도저히 영화 못 찍을 것 같다’고 두 손 들 줄 알았던 거다. 그런데 난 1999년 11월에 조민환 프로듀서와 같이 중국 북경으로 들어가서 제작 결정을 확정짓는 다음 해 5월까지 6개월 넘는 동안 귀국하지 않았다. (웃음)

직접 중국에 가보니 어땠나. 
막상 중국에서는 한국의 젊은 영화인들이 대륙의 서북 사막에서 대규모 무협영화를 찍겠다고 하니 ‘얘들이 여기 사정을 뭘 알고나하는 소린가~?’ 하는 느낌의 황당해하는 분위기였다. 할리우드에서 <마지막 황제>(1987)를, 왕가위 감독이 <동사서독>(1995)을 중국에서 촬영했지만. 그때만 해도 중국은 죽(竹)의 장막에 가려진 미지의 대륙이었다. 중국에 하나뿐인 영화학교 북경전영학원 출신 5세대 영화감독들이 영화제를 통해 제법 알려졌지만, 중국 영화는 주선율 영화(국가선전영화) 정도가 국가 지원으로 제작될 뿐 아직 산업화 단계로 들어서지 못한 걸음마 상태였다. 김형구 촬영감독, 이강산 조명감독, 정두홍 무술감독, 이병하 녹음기사, 이경자 분장감독, 정도안 특수효과 슈퍼바이저, 신재호 특수분장 등 <비트> <태양은 없다>에서 호흡을 맞췄던 스탭들과 함께 사막 촬영지로 사전 헌팅을 와보니 현지 제작 방식과 기술력이 많이 달랐고, 400명 이상의 제작팀 운송과 운영에 대해 경험도 없었고, 더욱이 모래바람 때문에 필름 교체조차 불가능한 사막 촬영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냐는 반응이었다. 

말씀을 들어보면 감독님께서 매 작품 전작에 대한 어떤 반작용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하시는 것 같다. <아수라>는 전작 <감기>를 찍고 난 뒤 ‘정말 내가 좋아했던 영화가 뭐였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고,  <서울의 봄>도 사람들이 <아수라>를 두고 ‘현실 세계 이야기와 판박이’라고 황당무계한 모함(!)을 하는 것에 화가 나서  ‘진짜 사실을 갖고 만든 영화를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으셨나. <무사>도 <런 어웨이> <비트> <태양은 없다> 등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다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으니 말이다. 
서울 토박이라서 도시 배경의 이야기가 늘 재밌었다. 하지만 곧 마흔이 될 나이가 되자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영화 속으로 나를 빠져들게 한 영화는 뭐였을까~ 어린 시절 나를 뜨겁게 감전시킨 오래된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서부극, 전쟁영화가 떠올랐다. 말을 탄 카우보이들과 소총을 든 군인들은 컴컴한 극장 안에서 환하게 빛나는 스크린에서 달려 나와, 죽음을 넘나드는 모험과 전쟁을 거뜬하게 치러냈다. 그 멋진 사나이들의 용맹함은 온 우주가 흔들리는 것처럼 강렬했고 꽤나 비극적이었다. 이태원에 위치했던 재개봉관인 태평극장을 뺀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한 그때가 1969년, 고작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아홉 살이었다. 어른들은 한국 전쟁의 기억(53년 휴전협정)이 또렷하겠지만, 코흘리개였던 우리는 월남 파병 부대의 군가를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나무 쪼가리에 쇠못을 박아 대충 만든 기관총을 겨드랑이에 끼고 “빵아 빵아” “투다다다다” 맨입 사운드로 돌비효과를 내면서 동네방네 뛰어다녔다.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아주 먼 과거를 배경으로 어떤 사내들의 피 튀기는 고군분투를 꿈꾸고 있었을지 몰랐다. 

 

다시 중국 얘기로 돌아가서 지금처럼 자료나 정보가 넉넉하지 않던 시절, 중국에서 로케이션 헌팅하는 건 맨땅에 헤딩하기나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처음에는 시나리오 속 공간을 방대하게 펼쳐놓은 바람에 중국 전역을 로케이션 헌팅 다녔다. 지금과 달리 이동의 자유가 없을 때라 차이나필름그룹의 허가를 얻어 중국 제작팀과 함께 중국 대륙을 누비면서 촬영 장소를 물색했다. 늘 도시에서 영화를 찍던 내겐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막, 숲, 해안토성 등 주요 공간 몇 군데로 나눠 각각의 공간에서 이야기를 어떻게 찍을까 고민했다. 특히 영화 초반부인 사막에서 제대로 찍어야겠다 싶었다. 그러면서 중국 사람들이 여름 낮 시간에는 촬영을 하면 안 된다는 팁도 얻었고. 처음에는 ‘그런 게 어딨어’라고 생각했다가 40도를 훌쩍 넘어가는 낮에는 정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새벽에 일찍 도착해서 찍고 점심을 먹은 뒤 한낮에는 2시간 동안 그늘에서 모든 인원이 축 늘어진 자세로 불가마 속 같은 더위를 피해야 했다. 본 촬영이 있기 한 달 전 닝샤 회족 자치구에 위치한 중웨이 시로 가서 4박5일 일정으로 테스트 촬영을 했다. 그보다 두 달 전 장혁, 전지현이 출연한 < Hey Girl >을 포함해 <일월지애> 등 제작비가 큰 뮤직비디오를 아르바이트 삼아 찍어서 두둑하게 받았던 연출료를 테스트 촬영에 쏟아부었다. 자연 개발 보호 구역인 사퍼토우 사막에서 촬영 허락을 받고 찍고 나니 중국 로케이션 촬영에 대한 제작진의 의견은 반으로 갈렸다. 절반은 여기서 촬영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였고, 또 절반은 해볼만하다!였다. 나는 찬성 스탭들로부터 자신감을 얻고 밀어부쳤다. 이후 진열을 재정비하고 각 팀을 구성하고 캐스팅을 완료한 뒤 전부 중국으로 넘어가서 8월6일 북경 근교 옛 성곽 장면부터 시작하여 8월10일 사막 촬영의 중심지인 인촨 시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프로덕션을 시작했다. 

제작적인 면에서 <무사>는 한국 영화가 한반도를 벗어나 낯선 중국 대륙에서 중국 현지 스탭들, 배우들과 함께 촬영했다는 점에서 한중 합작 영화의 선구자라 할만하다. 지금이야 많은 한국 영화가 해외에 나가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 해외 프로덕션이나 배우들과 공동 제작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합작 사례가 거의 없어 제작 난이도가 무척 높은 편이었는데.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1994) 팀이 강도떼를 만나서 호되게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속으로 무섭기는 했다. 중국 측 장샤 프로듀서의 조언대로 새로운 촬영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그 지역 행정 책임자(시장)와 공안담당자(지역경찰)부터 만나 함께 식사하고 선물을 드리고, 촬영팀의 안전을 부탁했다. 그래서인지 촬영 내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어려운 일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소소한 난관들은 오히려 나의 ‘흔들리는 자신감’을 계속 자극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기한 내에 영화를 완성시키고 말겠노라! 내가 똥고집을 부려 저지른 일이라 내가 앞장서 주워 담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모두가 반대했는데 투자사에서 그린 라이트가 어떻게 켜졌나. 
당시 CJ 엔터테인먼트에서 이미경 CJ그룹 부회장과 <무사>의 제작투자책임을 떠맡은 최평호 대표(현재 케이엔터홀딩스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사실상 유일하게 중국 합작을 응원해 준 두 사람이다. 이 부회장은 한국영화가 반드시 해외로 나가야한다는 신념이 강했기 때문에 CJ엔터테인먼트의 중국 시장 진출을 이미 결정한 상태였다. 북경으로 와서 합류해 준 최평호 대표가 CJ 중국 지사가 있으니 도와줄 수 있다면서 합작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함께 뛰어 다녔다.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난감한 상태에서 내 손을 잡아 끌고 등을 떠밀어 준 진짜 고마운 사람이다. 나와 조민환 프로듀서에게 차이나필름의 실력자를 소개시켜줬고, 아주 명석한 재중동포를 붙여주고 합작프로세스를 차근차근 밟도록 해줬다. 물론 이 모든 서포트는 이미경 부회장이 막후에서 든든하게 지원해줬기에 가능했다.  



제작자, 동료 영화인, 전작 스탭 모두 반대했지만 투자사에서 그린 라이트가 켜져…
 

주인공 여솔 역할은 처음부터 정우성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쓴 건가. 한국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긴 창을 든 채 말을 타고 액션을 하는 모습은 아마도 <무사>의 정우성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우성씨도 나도 그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도전하는 용기가 있었다. 우리 둘은 두 편의 청춘영화를 찍으며 대중의 칭찬과 전폭적인 응원을 얻었다. 우리 둘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얻은 힘을 뭔가 새롭게 도전하는 영화를 만드는 에너지로 사용하자!‘고 생각했다. 남들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가보자~는 용기로 시작했는데…막상 촬영을 시작하고 보니 내가 그 용기를 멋지게 완성시킬 능력이 모자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웃음) 

부용공주 역할을 연기한 장쯔이 배우는 어떤 계기로 함께 작업하게 됐나. 
원래는 오천련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했다. <천장지구>(감독 진목승, 1990)를 좋아해서 홍콩에 가서 오천련 배우를 만났었다. 제작 스케쥴이 지연되면서 우연히 장쯔이 배우를 추천받게 되어, <와호장룡>의 촬영을 끝내고 북경으로 막 돌아온 장쯔이를 캐스팅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진정한 합작 영화가 되려면 언어도, 문화도 섞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1991~92년 파리에 있었는데,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자 그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유럽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통합하자는 움직임이 요동쳤다. 유럽의 영화인들은 영화를 국적으로 구분하지 말자고 했고, 유럽에서 만드는 모든 영화는 유럽 영화라고 했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 유럽 각국 영화인들이 스탭, 연기자로 합심하여 일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영화를 통해 이웃과 주변 세계에 호기심을 드러내고, 낯선 세계와 소통하며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배우려는 그때의 분위기에 한껏 매혹되었다. 아시아 영화인들도 그렇게 서로 소통, 존중, 친밀해지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특히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 중간에 위치한 한국이 경계를 허물고 화합을 선도한다면…하고 멋대로 상상했다. 아마도 그 무렵 젊은이는 대부분 나처럼 막연하고 낭만적인 비전을 품었다고 기억한다. <무사>는 내 나름으론 ‘팬-아시안 영화’라는 원대한 비젼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혼란기의 중국대륙에 내던져진 고려의 무사들이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고, 투쟁하고, 화합하는 격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너무 많은 감독의 의도와 상징과 인물로 가득 채워진 <무사>는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고리타분하고 주제의식과잉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암튼 내 젊음의 열정을 완전히 불태운, 정말로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촬영 전 김형구 촬영감독과 함께 이 영화의 촬영에 대한 원칙을 어떻게 만들어갔나. 
처음에는 막연하게 70mm 시네마스코프영화로 찍고 싶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하여 슈퍼35미리 스퀴즈필름을 만들어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로 영사하는 방식을 택했다. 360도 뻥 뚫린 광활한 중국 사막에서 카메라를 돌리니 한국에서 찍던 배경과는 완전히 다른 선명도와 색감을 담아낼 수 있었다. 김형구 촬영감독과 나는 카메라 렌즈의 프레임 바깥에도 당당히 존재하는 진짜 세계를 찍는 실재감에 전율했다. 단편영화를 찍던 시절부터 친구였던 우리는 마침내 우리가 성장하여 뭔가 대단한 촬영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을 만끽했다.   

당시 김형구 촬영감독이 <무사>를 찍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봄날은 간다>(2001) 같은 멜로 드라마를 찍은 촬영감독이 사막에서 벌어지는 액션영화와 잘 어울릴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난 3월에 잠시 만나 얘기를 나눴다. 내 단편영화 <비명도시>(1993)를 포함해 <비트> <태양은 없다>를 촬영한 김형구 촬영감독과 나는 여러 측면에서 판이하게 다른 인간이다. 예를 들어 호수의 물고기를 잡는다고 치면, 젊었을 때의 나는 입에 칼을 물고 물속에 단번에 뛰어들어 잡아오는 반면(지금은 아님^^), 김형구 촬영감독은 가만히 수면을 응시하다가 불현듯 ‘이 상황에서 물고기를 잡는 게 중요한가?’ 라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내가 보기엔 그는 조용하고 느린 편이지만 상황의 본질을 바라보는 깊은 혜안을 가졌다. 내가 나무를 보는 사람이면 그는 숲을 보는 사람이다. 그 점에서 김형구 촬영감독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뛰어난 안목과 지혜로운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다. 저돌적인 성격인 나는 <무사>를 만들겠노라 무모한 결정을 하고, 김형구 촬영감독처럼 속 깊은 예술가는 그 도전을 현실화시키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우리 둘은 너무 다른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서로를 인정하고 좋아했고, 꽤 환상적인 팀플레이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새로운 시도를 했던 촬영 시스템이 있나. 
촬영팀 세컨드 유닛을 독립적으로 운용했다. 할리우드에선 제작 상황에 따라 촬영 세컨드 유닛이 대부분 운용되었지만, 당시 한국영화에선 자동차 추돌 장면, 폭파 장면, 대규모 군중신을 찍을 때 카메라 한대 더 빌려와 메인 카메라와 다른 각도에서 촬영하는 게 전부였다. 메인 카메라는 정속으로, 추가로 빌린 카메라는 고속이나 저속으로 찍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무사>때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세컨드 유닛이 활용된 덕분에 별도의 장소에서 촬영할 때는 조감독 조동오(<중천> <런닝맨> 감독)와 정두홍 무술감독이 세컨드 유닛팀의 연출을 번갈아 담당했다. 

이강산 조명감독과 함께 빛 설계를 어떻게 했나. 
야영장에 있는 여러 명의 등장 인물을 찍어야 하는 이야기라 인물을 부분적으로 조명하는 방식이 아닌 등장인물이 모두 한 프레임에 나오는 밤장면 와이드 쇼트에서 조명이 문제였다. 미국 촬영감독조합에서 매달 발행하는 촬영잡지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에 실린 미국 영화 촬영장 사진을 봤더니 하늘에다 달처럼 생긴 조명 장비를 띄워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강산 조명팀은 비슷한 걸 만들어 월광(달빛, 한밤중 야외에서는 유일한 광원)조명을 시도했다. 근데 사막에서 바람이 부니까 조명 장비가 흔들리는 바람에 달빛도 덩달아 흔들렸다. 바람이 분다고 달이 흔들리다니! 그래서 강철 프레임으로 조명기를 장착하는 틀(야구장 전광판처럼 생긴)을 만들고 그걸 크레인 장비로 공중에 올려서 빛이 수직으로 떨어지게 했다. 지금이야 보편적인 조명방식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어깨 너머로 외국 영화 촬영방식을 따라하면서 한국영화 특유의 촬영 시스템을 구축해나갔다. 

 

보통 무협 영화라고 하면 와이어 줄을 달고 날아다니는 액션을 떠올릴 법도 한데, <무사>는 한국적인 액션, 사실적인 타격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당시 신선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정두홍 무술감독과 함께 <무사>의 액션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 같다. 
정두홍 감독은 <무사>를 통해서 자신만의 사실적이고 강렬한 무협액션의 진수를 보여주려고 마음 먹었다. 물론 처음에는 와이어를 사용하는 아크로바틱한 무협액션을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와이어 액션을 준비하고 뮤직비디오에서 실험을 하면서 정두홍과 나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무협지처럼 놀라운 무공을 펼치는 게 맞는 건가~ 의문을 품었다. 나는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대륙을 횡단하는 여정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가는 서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정두홍은 관객이 사실적인 인물과 서사에 몰입하려면 등장 인물의 무술 실력이 보통 사람에 비해 조금 더 뛰어난 정도가 맞는다면서, 와이어액션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그때부터 정두홍은 중국식 무협 액션과 차별되는 한국 영화의 진짜스러운 사극액션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살을 베고 몸을 절단하는 끔찍하고 무서운 병장기를 눈앞에서 휘두르는 ‘진짜처럼 싸우는 리얼 액션’을 위해, <무사>의 배우들과 스턴트배우들은 사막에서 촬영기간 내내 땀을 흘리고 황무지의 거친 자갈 바닥에서 뒹굴었다. 감독으로서 감히 말하건데 <무사>가 이룬 성취 가운데 가장 값진 것 하나는 한국 영화의 사실적인 무협 액션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정두홍은 한국 액션영화의 최전선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정과 도전을 다 완수했다. 



시네마스코프, 세컨드 유닛 운용, 월광 조명, 한국적 사실적인 무협 액션 등 새로운 도전의 연속 

흥행적으로 <무사>는 비운의 작품이다. 개봉(2001년 9월7일) 나흘 뒤에 9.11 미국 테러 사건이 터지면서 흥행에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 많은 관객들이 심각하거나 진지한 영화를 보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그때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실 것 같다. 
<무사> 개봉 첫날 서울에서 흥행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모두들 엄청난 흥행 성적을 세울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 받은 까닭에 나와 조민환 프로듀서는 캐나다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고, 9월10일 밤늦게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이 2001년 9월11일이다! 영화제 행사에 가려고 샤워를 마쳤는데 호텔방 TV에서 뉴욕의 고층빌딩에 비행기가 충돌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뉴욕과 토론토는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인데 리얼 타임으로 생방송을 본 거다. 뉴스를 그만 보고 방을 나가려는데 두 번째 비행기가 날아와 충돌하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우리 둘은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영화 기자들을 위한 첫 스크리닝을 하고 있는 극장으로 갔는데, 중간에서 CJ 직원을 만났다. 영화 상영 중에 기자들이 하나둘 나가고 마지막까지 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맙소사... 영화제는 국가비상사태로 종료되었다. 참석한 게스트들은 투숙 호텔로 돌아가 대기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호텔로 돌아오는데 거리의 대형 TV 화면에서 ‘뉴욕 공항으로 향하던 폭탄을 탑재한 수십대의 비행기가 토론토로 방향을 틀었다‘는 자막 뉴스가 떴다. 물론 나중엔 오보라고 밝혀졌지만…그 순간 토론토 시내는 패닉에 빠졌다. 나 역시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내 영화에 대한 생각은 말끔히 지워졌고, ‘이국 땅에서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아득해졌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길바닥에 차들이 뒤엉키고 시민들이 인도와 차도에서 어린애처럼 울부짖는 광경을 보았다. 아...이런게 혼돈이고 아수라장이구나!! 토론토국제공항도 폐쇄되었다. 모든 비행편은 취소되었고, 해외로 거는 전화 라인은 국가에서 일반인 국외 통화를 차단하여 나를 포함한 누구도 한국으로 통화할 수 없었다. 며칠 동안 아내에게 전화를 걸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불가능했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흘이 지난 뒤에야 한국으로 전화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무사>가 한국에서 흥행이 급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안타깝다는 생각보다는 ‘당연히 그렇겠지~’하고 반응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의 상상력이 현실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때 그 경험이 이후 바이러스 때문에 정부가 국가 재난 사태를 선포하는 재난 영화 <감기>(2013)를 연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 같다. 
가족에 무심한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비상 상황이 발생하니까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목표 하나밖에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재난을 당한 사람은 전체 상황을 알 수가 없어서 재난이 벌어지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리셋되는 경험을 한다. 세상과 가치관이 순식간에 전복되는 놀라운 체험이다. 그러고 나서야 혼돈 속에서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기 시작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으려 한다. 내게 건네진 <감기>는 훌륭한 시나리오였지만 나는 토론토에 겪은 9.11의 경험을 적용하여 각색하려고 했다. 재난 속에 던져진 한 가족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가 전복되는 경험을 하고, 각기 자신만의 목적을 정해놓고 무작정 그걸 향해 간다는 어긋난 대응 방식의 스토리다. 하지만 내 각색고는 흥행성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투자자에게 가차없이 거절당했다. 아마도 투자자의 지혜로운 결정(!)이 맞았다고, 분명히 맞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암튼 그때 그 상황에서 <무사>는 내 머리에서 깨끗하게 지워졌다. 나 자신이 영화를 위해 태어났고, 내 인생에서 영화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늘 생각했는데 그 사건을 겪는 내내 영화에 대한 아무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 악몽을 겪으면서 세상에는 영화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7월4월부터 14일까지 열리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무사> 4K 리마스터링 버전을 상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수라>와 <서울의 봄>에 열광한 젊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보길 바라나.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늘 똑같다. 누군가가 내 영화를 어떻게 봐달라고 하지 않는다. 나 또한 누군가가 그들이 만든 영화를 이렇게, 저렇게 봐달라고 조언해 줘도, 절대로 그런 가이드대로 보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볼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영화는 저절로, 나의 눈을 통해 전달된다. 그 영화가 어떤지, 재밌는지, 어려운지, 이상한지~ 아주 자연스럽게 스스로 대답한다. <무사>는 나 자신도 긴 세월 동안 한번도 보지 않았다. 한국영상자료원 파주보존센터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무사>를 보는데, 예전에 내가 기억하는 스토리는 일치하지만 뭔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뭔지 한참을 생각했다. 2001년 극장 상영할 때와 필름의 색채와 많이 달라져 있어서 작업하신 분들께 ‘한 시퀀스만 색감을 이렇게 해달라’고 주문했다. 

그게 어떤 시퀀스인가. 
고려무사들이 부용공주를 구하기 위해 사막의 가파른 언덕을 뛰어 내려오는 액션 시퀀스다. 이 시퀀스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색감으로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화면의 색감이 발갛게 변해가는 동안 20여년만에 마주한 <무사>의 스토리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촬영할 때 검게 그을린 동료들의 얼굴과 촬영장에서 생긴 여러 일화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떤 장면을 찍을 때 나눈 대화, 촬영장의 때론 나른하고, 날마다 분주했던 풍경들이 스쳐갔다. 내 인생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근사한 추억이 있었다는 사실에 왠지 뭉클해졌다. 내 젊은 날의 원대한 꿈을 영화 속에 조화롭게 담아내지 못했지만, 어떤 채워지지 않는 욕심과 도전과 용기를 그때의 내가 갖고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지금도 그때와 같은 담력과 열정이 내 안에 남아있을까? 더 늙기 전에 다시 기회가 되면 <무사>처럼 근사한 도전을 또 하고 싶은데…세찬 모래바람이 날아와 얼굴을 때리는, 아니 기억 속에선 모래알들이 부드럽게 눈앞에서 흩날리던 그 아득한 경험의 날들이 사무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