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영화인가’에 제대로 답했다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 현장 기록
글: 신재영(한국영상자료원)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했거나, 특별한 순간에 우연히 마주쳤거나, 오랫동안 습관처럼 간직했거나. 영화는 여러 가지 상황을 빌려 찾아오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영화와 친해진다. 어떻게, 얼마나 친해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인데, 혹자는 영화에 초점을 맞춰 살아가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연출, 연기, 제작, 비평 등 다양한 길이 있지만 영화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작업은 그것만의 방식으로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매체이자 예술로서 발전을 거듭한 역사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에게 세심하게 주석을 단다. 그리고 같은 시기이더라도 국가나 문화권별로 다른 종류(때로는 같은 종류)의 영화를 만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며 영화라는 개념 자체를 폭넓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영화학자들은 이렇게 수많은 경험과 이론을 가지고 논의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에 대한 단상에 논리를 부여했고, 산업적 성과들 사이의 공백을 메웠다. 근거 있는 오랜 관심이 필요한 지금의 한국영화에게 현 위치와 향후 전망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짚어줄 존재들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 속의 한국영화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변화해오고 있을까?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은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영화학자들이 각자의 연구 주제에 관한 강연으로 국내 대중을 만나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기획 시점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기원’을 주제로 국제 콘퍼런스가 열린 지난해 11월 홍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해외 영화학자들이 한국영화를 주제로 한 연구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리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고, 그중 UC 버클리대 안진수 부교수는 이러한 의지를 가진 학자들을 위한 허브 역할을 영자원이 해주기를 요청했다. 다행히 몇몇 학자들이 올해 여름 잠시나마 한국에 체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안진수 교수와 영자원이 협업해 이들을 초청하고 강연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6월 24일부터 7월 5일까지 2주 동안, 같은 듯 다른 여정을 지나 한국영화를 연구하게 된 여섯 명의 영화학자가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 왜 한국영화인가’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학자별로 하루씩 강연을 맡았으며, 수강 신청한 관객들은 매주 월, 수, 금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영자원을 찾았다. 한국영화의 특징이 형성되던 시기를 국내에서 경험했으면서도, 세계적 주목이 시작된 후에는 해외에서 관련 현상을 연구하고 알려온 이들의 관점은 색다르고도 매력적이었다. 혹은 해외에서부터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자신만의 학문적 배경 또는 이론을 적용한 이들 역시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해 주었다. 핵심 질문은 두 가지이다. 한국영화를 연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고 현재 해외 관객에게 한국영화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지, 그리고 영화학자로서 그들이 매진하고 있는 한국영화 관련 연구 주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신을 영화학자로 만들어준 작지만 뜻깊은 순간들을 소개함과 동시에, 한국영화라는 공통의 연구 주제 속에서 각자의 개성을 선명하게 보여준 이들의 열정 어린 이야기를 이곳에 정리한다.
1강.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어떻게 볼 것인가?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영화과 조교수 정승훈
(사진 제공. 정승훈)
정승훈 교수는 보편적 영화 이론 연구 이야기에서 시작해, '세계화' 전개 방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오늘날의 글로벌 시네마가 형성된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전해주었다. 어린 시절 해외 극영화를 TV로 접하면서 영화 이미지의 매력을 처음 발견한 그는, 이후 1990년대 국내 시네필 문화의 일원으로서 영화비평에 관심을 가졌고, 2003년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평론상에 공모하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의 질적 전환을 이끈 이창동과 홍상수의 작품을 비교한 것을 계기로, 당시 한창 순항 중이던 한국영화 자체를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다만 그는 현장 비평이 요구하는 시의성에 압박감을 느꼈고, 평론가 대신 연구자의 길을 택한 후 해외에서 박사 과정을 거치고 나서 뉴욕대 아부다비 캠퍼스에서 강의했다. 세계화의 여파가 강력한 곳 중 하나인 아부다비라는 공간에서 그가 연구를 지속하던 와중 한국영화는 2010년대를 지나며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올랐다. 여러모로 세계화에 대해 고찰할 기회가 많았던 그는, 한국영화를 포함한 많은 영화들이 오늘날의 세계화 프레임에 맞게 이해될 필요를 느껴 글로벌 시네마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화 시대의 영화를 ‘글로벌’ 프레임에 따라 분석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관용, 환대, 다양성 존중을 중시하는 ‘연성 윤리(soft ethics)’가 국제사회의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으로 내세워졌다. 그러나 그는 9.11 테러와 대테러 전쟁에서 보듯, 글로벌 체제에서 관용될 수 없는 행위에 대한 ‘배제’가 폭력적이더라도 정당화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연성 윤리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경성 윤리(hard ethics)’가 병존하는 것인데, 관용될 수 없는 자들을 배제하는 자와, 그렇게 배제된 자들이 다시 자행하는 폭력으로 인해 오늘날에는 오히려 인간 생명을 볼모로 한 ‘생명정치(biopolitics)’가 만연해진 것이다. 그 결과로 체제 안에서 주체로 살아갈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비체(abject)’들이 생기고, 이러한 비체화의 현실을 담아낸 재난 또는 재앙이 그에 따르면 오늘날 글로벌 시네마의 단골 주제가 됐다. 그리고 그는 비체들이 우연히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주는 경험을 해가면서 연대하는 과정에서 글로벌 체제 속 연성 및 경성 윤리와는 구분되는 비체 간 대안 윤리가 제시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 1강(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어떻게 볼 것인가?) 강의 모습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영화, 즉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역시 유사한 경향을 보이지만, 조금 특별한 지점이 있다. 2000년대 초반 부상한 감독들의 작품에서, 생명정치의 피해자인 비체들이 당한 폭력을 묘사하는 방식에는 감독 각자가 한국 현대사(특히 1980년대)를 관통하며 지니게 된 모종의 정치성이 녹아있다. 그는 천만 영화 속에서 이러한 특징이 극대화된 모습을 ‘미완성 근대 국가 프로젝트’라는 용어로 묘사한다. 다만 한국영화를 포함한 최근의 글로벌 시네마에서는, 작품 속 비체화의 주범이 정치권력에서 ‘경제권력’으로 전환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이나 개인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비체화하고 자본의 힘으로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또 다른 버전의 생체권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마지막으로, 글로벌 시네마가 (아직은) 극복하지 못한 한계로서 ‘수행적 자기 모순’을 언급했다. 세계화 시대 윤리의 이중적 측면을 비판해 대중의 환영을 받고 화제가 되었는데, 작품은 상품이 되어 그것이 비판하던 자본주의 체제로 흡수된다. 지극히 견고해진 글로벌 체제 안의 관객에게 작품에 담긴 메시지의 날카로움이 더 이상 지각되지 않는 현실을 영화학자로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그는 관객에게 함께 고민해주기를 부탁했다.
2강.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어느 한국영화학자 성장기와 아카이브의 발견
콜로라도 주립대 커뮤니케이션과 교수 정혜승
(사진 제공. 정혜승)
정혜승 교수가 영화학자가 되는 여정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TV로 할리우드 고전영화를 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20세기 중·후반에 국내에 전해진 할리우드 영화, 그중에서도 미국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엠지엠 스튜디오(MGM Studios) 스타일의 판타지에 매료되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이후 성인이 될 때까지 이 관심은 계속되어, 영화 또는 미디어 관련 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학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해외에서 막 연구를 시작했을 때 알려진 한국영화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 <오징어게임>(황동혁, 2021)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둬 미국 대중문화에 침투하는 과정을 지켜본 그는 이전까지 넷플릭스를 통해 공유되어 온 한국의 콘텐츠가 전 세계 팬들에 의해 해석되는 방식을 소개했다. 현재 넷플릭스가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는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는 주로 액션 위주의 폭력적인 소재와 기괴한 분위기로 ‘미국적’ 취향에 근접해있다고 그는 분석했다. 이와 별개로 국내 케이블 채널과 넷플릭스가 공동 투자해 제작하는 스타 중심의 TV 드라마 콘텐츠들은 ‘폭력적 스펙터클 없이 삶의 어두운 면을 다루고, 진실된 설정의 인물들과 서사로 주제에 완곡하게 접근한다’라는 평가를 받는다며, 주변에서 보고 들은 반응을 모아 들려주었다. 또한 한국 콘텐츠가 OTT 시장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에 대한 우려 역시 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국내 창작자들만의 새로운 브랜드를 확립할 기회가 모색될 수 있다며 긍정적인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OTT 시대의 세계화된 한국콘텐츠에 대한 관심에서도 나타나듯이, 그는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로서의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주로 이론에 근거해 영화 연구와 집필을 이어왔다. 하지만 미국 영화학 연구의 경향을 참고하던 중, 아카이브 소장자료를 참고해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실증적인 연구 방법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워싱턴 연방정부와 할리우드 민간산업 아카이브들에서 희귀한 자료들을 발굴하면서, 국가정책이 문화 재현에 미치는 영향을 1차 자료를 통해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 학술적 영감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는 1960~80년대 한국영화 검열사를 연구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고(앞서 이야기한 동시대 콘텐츠에 대한 연구와 병행했다), 영자원이 공개한 바 있는 방대한 분량의 검열서류 컬렉션을 열람하며 연구를 진척시켰다.
* Cinema Under National Reconstruction (저자. 정혜승, 출간 예정)
그는 자신의 영화 검열사 연구 방법론을 설명하면서, ‘검열’이라는 주제에 대해 기존의 비판적 여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과정을 이야기했다. 검열자와 피검열자 간 긴장이 유동적인 관계로 해석될 가능성과 더불어,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산업을 보호하고 여러 사회집단 관객의 감정을 수용하려는 맥락이 검열의 목적의식에 미친 영향에 관한 의견을 공유했다. 한국고전영화의 경우, 낙관주의적 사회상을 강조한 1960년대 정부 기조에 따라 진행된 검열 과정을 예로 들며, 자신의 관점을 <오발탄>(유현목, 1961)과 <마부>(강대진, 1961)에 적용한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검열 연구 당시 작품 507편에 대한 검열서류가 공개되어있는 영자원의 컬렉션을 보고 느꼈던 놀라움도 언급했다. 공공 필름 아카이브로서 과거 국가기관이 작성한 대규모(공개되지 않은 자료들을 합하면 총 1만여 점)의 행정서류들을 보존하면서 상당량을 온라인으로 공개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본래 영화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아카이브의 내실’이라는 점에서, 영화를 넘어 문화 행정의 역사를 조사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본 컬렉션을 귀중한 1차 자료 모음집으로 추천하고 싶다고 전했다.
3강. 장르적 ‘팬덤’과 ‘한류’ 담론의 관계성에 관한 고찰, 그리고 박찬욱
UC 데이비스대 역사학과 일본-한국 전공 부교수 김규현
(사진 제공. 김규현)
역사학자이자 열렬한 영화 ‘팬’의 면모를 보인 김규현 교수는 ‘타인의 인정을 요구하지 않는 애호’의 마음으로 한국영화를 지켜본 시간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1960~70년대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일본 만화에 깊이 빠져들었고, 소위 ‘컬트’로 분류되는 영화에도 흥미를 느껴 관련 작품의 DVD를 직접 구매하며 감상의 시야를 넓혔다. 달시 파켓이 개설한 한국영화 관련 영문 리뷰 사이트 “Koreafilm.org”에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그가 현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성공에 기여한 숨은 요인으로 “대중문화 소매상들(retailers)과 중개인들(brokers),” 흔히 ‘컬트 영화 팬’이라고도 불리는 영화 애호가들의 존재를 강조했다. 그 자신도 여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하는 당시 2000년대의 북미사회는, VHS와 DVD가 법의 테두리 안팎에서 활발히 유통되며 소위 ‘그레이(gray) 마켓’이 형성되던 시기이다. 영화제나 극장에서는 접할 수 없는, 자극적이지만 신선하고 완성도 높은 각국의 장르 영화들에 열광하는 영화 팬들이 홈비디오를 마음껏 탐색하며 “대중문화 소매상” 겸 “중개인”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들이 애용한 매체인 홈비디오는 점차 가속화된 기술 혁신에 힘입어 디지털 ‘복원’된 영상을 DVD에 수록하기에 이른다. 1990년대부터 민주화와 검열 완화, 영화 제작 기술의 발전을 경험하며 르네상스를 이룬 한국영화 역시 2000년대 초반부터 이와 같은 경로로 전 세계 컬트 영화 팬들, 즉 대중문화 중개인들에 의해 향유되며 세계화의 기반을 다졌다고 그는 분석했다.
그가 특별히 애호하는 한국영화 작가인 박찬욱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박찬욱 감독이 북미 관객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맥락도 살펴볼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박찬욱 감독의 경향은 세계 영화사 계보의 흐름을 잇는다. <올드보이>(2003)에서의 ‘금기된 사랑’이라는 주제, 그리고 인물의 신체나 정신이 추락하기 직전의 상황에 즉각적으로 발현되지 않고 응어리져 있는 복잡한 감정으로서의 서스펜스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8), 폴 슈레이더 각본의 <강박>(브라이언 드 팔마, 1976)에서 나타나는 바와 유사하다. 그는 박찬욱 감독이 보통의 장르 영화 속 단순한 윤리 지형에서 벗어나, 정교한 인물 설정과 내러티브를 통해 감정적 반응이 복합적으로 발생하도록 하는 영화의 흐름을 멋지게 계승하고 있다고 말했다.
4강. 한국영화와 영화 영문 연구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영화비평과 부교수 스티브 최)
스티브 최 교수는 독일의 이론을 기반으로 영화를 연구했던 배경, 특히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바깥의 영역을 구축하는 유럽 예술영화의 특성에 관심을 가졌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영화 연구에 도전했다. 그리고 석사 과정 시절 지도받은 린다 윌리엄스의 관심사이기도 했던, 멜로드라마로 대표되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고전영화 모두를 보고 자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주역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이 1960년대 출생 감독들이 2001년 이전의 전형적인 멜로영화가 강요하는 윤리의식과 감정 이입 방식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를 다루는 저서 Sovereign Violence(2016)를 집필했고, 이때부터 ‘한국영화’를 주제로 학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다.
현 시점에서 그가 파악한 영화 연구의 대체적 경향은, ‘영화’가 아닌 ‘미디어’로 연구의 초점이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지켜본 많은 해외 영화학자들은, 인간이 세계를 감지하는 ‘인터페이스’로서 영화가 기능하는 측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개별 작품이 아닌 플랫폼(OTT 등)에 관심을 가지는 등,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연구가 지배적인 상황이다. 따라서 현지 아카이브에 보존된 문서나 기록 등을 참고해야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다만 해외 영화학계에서 ‘한국영화’의 학제적 위치는 매체 관련 학과가 아닌 한국학과나 동아시아학과라는 것을 특이점으로 꼽으며, 한국영화 역시 실증적이고 사회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연구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인문학 이론에 기반해 한국의 영화와 매체를 연구하고자 하기에, 이러한 개인적 방향성과 최근의 경향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앞으로는 인간과 윤리의 의미, 전통과 모더니티의 관계 형성 과정,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친 인프라 등의 거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한국 영화와 매체가 고찰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언급하기도 했다.
매체에 대한 본질적이고 인문학적인 연구로서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주제는 ‘감정’인데, 그는 최근 한국의 콘텐츠가 거세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매커니즘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중에 한국의 ‘드라마’가 최적의 연구 대상임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한국드라마가 시청자에게 감정을 전파하는 방식으로서 자신이 발견한 ‘정서적 막간(affective interlude)’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인물이 아픈 기억을 회상하거나 진심을 담아 행동하는 장면에 클로즈업이나 슬로우모션, 그리고 음악을 사용해 감정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한국 드라마만의 기법을,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2022)를 예시로 들어 강연 현장의 관객과 공유하기도 했다.
5강. 한국영화의 재현 변화 양상: 언술 행위의 표현력과 신체의 의미에 주목하며
UC 버클리대 동아시아 언어와 문화학과 부교수 안진수
(사진 제공. 안진수)
중학교 2학년 때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이더스>(1981)를 보고 열광했던 안진수 교수는 작품의 기획자인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 역시 정복하며, 아름다운 스펙터클의 액션 블록버스터를 중심으로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1987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도서관이나 예술영화관에서 꾸준히 영화를 관람하다가 학부에서 영화를 전공하며 영화 이론을 공부했다. 동시에 영화 감상의 스펙트럼을 넓히면서 공포 영화를 중심으로 한 장르 영화의 재미를 알게 된 이후, 한국학 연구 기반이 잘 조성된 UCLA에서 영화 관련 석·박사 과정을 수학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학이나 동아시아학 연구에도 자연스럽게 노출되었으며, 이후 한국어와 한국학, 영화이론과 뉴미디어 강의를 지속해 현재는 해외에서 한국영화와 문학개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 역시, 해외에서의 한국영화 연구는 주로 ‘한국학’의 범위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학은 언어(한국어)에 대한 분석을 도와주는 지역학으로서의 이점을 살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국가나 문화권의 삶의 형태 자체를 습득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한국학 분야 내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히 높아진 만큼, 한국영화가 언어, 문학, 역사 등의 다른 분과들과 연구되며 발휘할 시너지에 대한 기대도 높은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영화학자에서 출발해 한국학자로서도 활동하게 된 그는 영화에 접근하는 방법론 중 하나로서 ‘언술 행위 분석’을 제시했다. 1990년대 이후 ‘말문이 트인’ 한국영화를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접근법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사회 각 분야에 자리 잡던 1990년대에는 개인 간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기가 이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게다가 인터넷까지 보급되기 시작하며 자유로운 말하기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한국영화는 이전 세대 작품들보다 더 많은 양의, 직설적이고 독특한 대사들을 동원하는 경향을 보였다.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와 더불어 당시 한국영화가 시급하게 생각한 ‘대중성확보’라는 과제도 여기에 영향을 미쳐 영화 속 새로운 표현력이 발휘되었다고 그는 분석했다. 한국사회의 일면을 그대로 드러내 사실성을 극대화한 언술이 이때 추구된 ‘대중성’이 달성되는 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것이다.
영화 속 언어는 대화를 통한 ‘구어’로 구사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언어철학에서 언어의 의미는 언어 자체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는 맥락을 파악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된 것처럼, 영화 속에서 구어를 접하고 나서야 그 단어나 구절의 실질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서 언어가 세계와 함께 직조되어있다고 표현된 것을 그는 언어와 세계의 ‘접착’으로 더욱 강조해 설명한다. 언어는 세계와 분리된 채로 그것을 지시하지 않고, 삶의 형태를 응축하고 있다가 덩어리째 내뱉는다. 타인에게 착취당하지 않으면서 호의를 베풀 방법을 고민하는 현대인들이 <부당거래>(류승완, 2010)의 명대사에 열광하고,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2005)의 “너나 잘 하세요”가 교감적 소통(상대의 답변 내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메타적으로 인지하고자 하는 소통)의 법칙을 위반한 금자라는 인물의 특성을 각인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6강. 재현의 규범화, 그리고 한국 및 아시아 퀴어 영화의 실험과 도전
워싱턴대학교 아시아언어문학과 조교수 김응산
(사진 제공. 김응산)
어린 시절의 김응산 교수는 극장 관계자인 어머니 지인의 배려로 지금은 사라진 청주극장에서 종종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고향 청주의 단관 극장에서의 이런 풋풋한 기억을 시작으로, 그는 이후 몇 편의 장르 영화와 그 개봉 포스터들에서 롤랑 바르트의 개념인 풍크툼(punctum), 즉 사진을 보았을 때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서 감상자 개인에게 강력하게 전해지는 ‘찌르는듯한’ 충격 또는 감흥을 발견했다. <양들의 침묵>(조나단 드미, 1991)에서 트랜스포비아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은 트랜스젠더 연쇄 살인범 인물의 설정, 감각적인 포스터, 잔인한 살인 장면 등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캐리>(브라이언 드 팔마, 1976)를 비롯한 여타의 공포 영화에서는 괴물이나 악인으로서 배척받다가 복수의 화신이 되는 주인공의 시점에 이입해 왠지 모를 슬픔을 감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영화 속 풍크툼이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임을 실감했고, 이를 전달하는 ‘퀴어’한 형상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의 일부로 영화제를 조직하거나 영화를 상영하면서 영화가 군중을 대상으로 발휘하는 힘을 목격했으며 영화나 영화학에 관한 번역서를 탐독했고, 퀴어를 주제로 한 다양한 양태의 작품들을 접했다. 특히 <올리버>(닉 디오캄포, 1983)와 같이 현실의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와 ‘타협’하거나 <세친구>(임순례, 1996)처럼 무기력하고 소위 쓸모없다고 치부되는 이들 간 연대의 가치를 암시하는 퀴어 영화를 접하면서, 서구적 관점으로는 충분히 해석될 수 없는 퀴어 영화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데 흥미를 느꼈다. 이는 그가 미국 유학을 떠나 영화학을 전공으로 삼게 되었을 때 주요 연구 주제로 영미권의 ‘뉴 퀴어 시네마’가 아닌 아시아 퀴어 영화를 선택한 것으로 연결된다. <줄탁동시>(김경묵, 2011)와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2016), <프리즈마>(임철민, 2013) 등 정체성에 기반한 기존의 통념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퀴어한 인물들을 영화적으로 재현하거나, 게이나 레즈비언 등으로 수렴되지 않는 배제된 이들 간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는, 혹은 새로운 미학적 시도를 통해 퀴어성을 구현하는 국내 작품들은 관련 연구를 심화하는 데 좋은 영감이 되어주었다.
현재까지도 그는 1990년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미학적 실험을 거듭하는 한국과 아시아 퀴어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한편, 퀴어 영화 연구에 대해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데 저항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또한 퀴어성은 현실의 규범으로는 용납되지 않기에 언제나 이상적인 개념임에도 현실과 결코 분리될 수 없고, 아울러 거의 모든 퀴어 영화가 과거의 어떤 순간들을 되짚어 가는 독특한 시간성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국내 퀴어 영화들이 동성 결혼이나 정체성 정치 등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면서 나날이 규범화 되어가는 면도 있지만, 그는 이와 같은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시간성을 통해서, 그리고 미학적 실험을 통해서 퀴어성을 구현하는 영화들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규범성에 유연하게 타협하거나, 그 규범의 범위 밖에서 돌봄을 실천하며 고통받는 타인과 연대하는 퀴어의 태도가 한국 및 아시아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것을 고무적으로 보고, 퀴어 영화의 새로운 희망이 여기 내포되어있다는 점 역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한 사람 당 하루씩 총 6일에 걸쳐 진행된 특강은, 한국영화가 이토록 다채로운 영화학 연구를 수용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또한 영화학자로서의 지금을 만든 그들 각자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깊이 공감할 만한 대목에서 다함께 웃었고, 영화에 대한 관심을 영화학 연구로 이어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 역시 참고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러한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의 영화들을 폭넓게 수용하며 영화 현장이나 비평계에서 미처 주목하지 못한 개념을 바탕으로 (한국)영화의 미래를 내다보는 그들이,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지속 가능해지는 데 기여해주길 바라는 왠지 모를 기대감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강연을 듣고 진솔하게 소감을 전하며 현명한 질문도 던진 관객들에게서, 영화학 하는 사람의 외로움과 열정에 공감하는 ‘예비 영화학자’의 모습이 생각보다 자주 발견되었다는 점도 반가웠다. 짧지만 뜻깊었던 6일의 시간이 그들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꿈을 가지게 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각 연구자의 자세한 강연 내용, 그리고 현장에서 나온 질문과 답변은, 7월 말부터 차례로 게시되고 있는 KMDb 영화글 ‘KOFA 특강노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