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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비 변화의 시작, 시네라마(Cinerama) | 2024.08.22 | 3925 |
화면비 변화의 시작, 시네라마(Cinerama)
글 박홍열 촬영감독('원더랜드', '이상한나라의 수학자', 넷플릭스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이창동 감독의 단편 '심장소리') ![]() * 시네라마 돔 © By Codera23 - Own work, CC BY-SA 4.0 시네라마(Cinerama)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의 화면비는 1.37:1(1.33:1) 하나였다. 시네라마가 등장한 이후 와이드스크린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화면비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는 화면비의 정해진 규격이 없었다. 에디슨의 조수 윌리엄 케네디가 키네토스코프에서 1.331로 화면비를 개발하고, 코닥도 이 규격에 맞는 필름을 생산하면서 1909년에서야 정식 규격화되었다. 아카데미 화면비인 1.37:1은 유성 영화의 등장으로 필름에 사운드 영역이 필요하면서 1.33:1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규격이다. TV가 등장하고 기존 영화용 카메라로 TV 콘텐츠들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영화 화면비를 TV도 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화면비는 필름 규격과 카메라 몸체와 렌즈의 사이 이미지를 받아 들이는 입구의 크기로 화면비가 결정되므로, 기존의 영화 카메라를 사용하면 TV도 영화와 같은 화면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1950년대 TV가 완전히 대중화되고 영화와 TV의 차별성이 사라지면서 극장과 영화산업 전반에 큰 위기가 닥쳐온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극장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가로가 긴 화면비인 와이드스크린이고, 그 시작이 시네라마였다. ![]() * 시네라마 도식
TV의 대중화로 극장과 영화산업에 큰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등장한 시네라마 시네라마는 시네마(Cinema)와 파노라마(Panorama)의 합성어이다. 1935년 프레드 윌러가 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의 사격 훈련용으로 처음 개발한 것을 적용한 것이 시네라마이다. 요즘 디지털 VR의 시초이다. 이 시스템을 개발한 사람은 감독 겸 엔지니어였던 프레드 윌러로 카메라 3대를 하나의 모터에 연결하고 동기화시켜 촬영하고, 3대의 영사기로 극장에 상영하는 것이다. 시네라마는 27mm 단초점 렌즈 3개를 하나의 카메라 안에 배치, 동시에 촬영된 3개의 영상을 옆으로 나란히 이어서 상영하며 화면의 좌우 시야각이 146도, 화면비율은 2.59:1 또는 2.65:1로 가로가 긴 화면이 압도적인 임장감을 제공한다. 시네라마는 7개의 오디오 채널로 서라운드 사운드를 표현할 수 있고, 넓은 시야각으로 커브드 된 스크린에 영사 사실적인 체험을 극대화했다. 시네라마의 첫 작품인 <이것이 시네라마다>는 미국 뉴욕 워너 극장에서 2년에 걸쳐 상영되며 큰 인기를 끌었고, 영화산업의 위기 속에서 와이드스크린의 상업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시네라마는 3개의 필름이 카메라와 영사기에서 동시에 움직이게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촬영 시 렌즈를 교환할 수 없어 오로지 하나의 렌즈로만 전체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다 보니 극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는 데 많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시네라마는 존 포드가 공동연출로 참여한 <서부 개척사>(1962)와 <그림 형제의 멋진 세계>(1962) 두 편의 극영화를 남기고 사라진다. ![]() 압도적인 임장각과 사실적인 체험을 극대화했지만, 하나의 렌즈로만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는 한계도 드러내 와이드스크린의 상업성을 인지한 영화 산업계는 파라마운트가 시작으로 기존의 1.37:1 화면에서 위아래를 잘라 만든 1.66:1 화면비를 개발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원래 화면을 잘라내고 화면을 더 크게 영사하면서 화면은 큰 와이드 스크린이지만 화질 저하라는 문제를 만난다. 반면에 시네라마의 성공을 본 20세기 폭스사는 1920년 프랑스에서 개발된 애너모퍼스코프(Anarmorphoscope) 가로의 화면을 세로로 압축하는 기술을 활용한 애너모픽 렌즈를 제작하고 가로가 긴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를 개발한다. 화면비는 2.35:1에서 2.66:1 까지 다양하다. 1953년 시네마스코프로 만들어진 첫 영화 성의(The Robe)가 개봉한다. 시네라마와 달리 촬영과 영상이 용이하고 비용도 적게 들기 때문에 폭스사는 시네마스코프로 영화제작과 함께 애너모픽 렌즈 판매로 큰 수익을 거둔다. 파라마운트는 첫 번째 와이드스크린의 실패를 기존 촬영 방식과 반대로 필름을 가로로 찍고 영사는 세로로 바꿔서 하는 비스타비전(Vistavision)을 개발하여 와이드스크린에 적용한다. 비스타비전은 가로로 촬영하고, 한 프레임의 필름 면적이 8개의 퍼포레이션(필름 옆 구멍)으로 이루어진다. 화면비는 1.85:1로 넓게 필름 가로로 촬영을 하고 영사할 때는 필름을 좁게 세로로 영사함으로서 화질을 우수하게 만들었다. 영화 <십계>(1956), <나는 결백하다>(1955),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59)등이 비스타비전으로 촬영되었다. ![]() * 화면비 비교 © FilmmakerIQ.com 와이드스크린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영화 제작자인 마이크 토드는 아메리칸옵티컬과 공동으로 70mm 필름 포맷인 토드(Todd)-AO를 독자적으로 개발한다. 화면비는 2.20:1로 토드-AO는 시네라마가 실현하던 영상을 카메라 1대로 촬영하고, 영사기 1대로 재현하여 시네라마에 가장 가까운 기술을 카메라 1대로 구현하기를 시도한다. 토드-AO는 65mm 필름으로 촬영한 다음 5mm 사운드트랙을 삽입하여 70mm로 프린트 인화했다. 초당 프레임레이트는 30프레임으로 기존 24프레임과 달랐다. 극장의 기존 영사기로는 토드-AO 프린트를 상영할 수 없어서 전용 영사기를 필요로 했다. 또한, 스크린 뒤에 6개의 사운드 스피커를 설치해야 했기 때문에 극장 설비 비용이 많이 들어, 16년 동안 미국에서 토드 전용극장은 15개 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시네마스코프에 밀려 사라지게 된다.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과 80일간의 세계 일주등이 토드-AO로 촬영되었다. 50년대 후반 카메라와 렌즈 장비 전문 업체인 파나비전도 와이드스크린 개발에 뛰어든다. 필름 폭이 35mm보다 2배인 최종 70mm 포맷으로 고화질의 와이드스크린을 실현한 울트라 파나비전 70(Ultra Panavision 70(MGM camera 65))라는 새로운 카메라 시스템과 포맷을 개발한다. 화면비는 2.76:1로 영화<벤허>(1959)가 MGM65로 촬영되었고, 이후 슈퍼 파나비전 70(Super panavision 70) 화면비 2.20:1로 진화한다. 아라비아 로렌스가 슈퍼 파나비전 70으로 촬영되었다. ![]() * MGM 카메라 65로 촬영 중인 <벤허> 영화 현장 시네라마의 진화…토드, 울트라 파나비전 70, 슈퍼 파나비전 70 개발로 이어져 시네라마가 시작한 와이드스크린에 대한 표현은 현재 IMAX까지 이어진다. 화면비 1.43:1 또는 1.90:1로 아이맥스(IMAX)는 1967년 몬트리올 박람회에 처음 등장하여 관심을 크게 끌었다. 1973년 옴니맥스(Omimax)라는 방식도 나온다. 스크린 사이즈가 너무 커서 화면 속 인물을 바라보는 관객의 부담감 때문에 일반 극영화에는 적절치 않다는 선입견이 생기며 다큐멘터리 등에 주로 쓰이게 된다. 아이맥스 상영을 위해서는 영사기 뿐만 아니라 큰 스크린을 위한 극장을 다시 새로 지어야 하는 문제로 보편화되지 못했다. 2000년 후반 일반 멀티플렉스에서도 상영 가능한 2K Digital IMAX와 4K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의 등장으로 IMAX 극영화까지 확대되었다. 영화산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시네라마가 불러온 화면비의 다양성은 이후 영화 안에서 화면비를 통한 영화적 미학을 구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산업의 요구가 표현의 다양성과 미학으로 전이되었고, 그 시작에 시네라마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