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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4편, 문화재로 인정받은 이유 2024.12.20 781
한국영화 4편, 문화재로 인정받은 이유
<낙동강>, <돈>, <하녀>, <성춘향> 국가등록문화유산 등재 예고 

글: 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근현대사 속 소중한 자산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을까? 한국영상자료원이 추진하는 영화 필름의 국가등록문화유산 등재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유산을 미래 세대와 나누기 위한 중요한 움직임이다. 영화는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기록물이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은 형성 후 50년 이상이 지난 근현대 문화유산 중 보존과 활용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인정된 자산이다. 기존의 지정문화재 제도는 문화유산 보호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제도적 경직성과 보호 대상의 제한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신고제와 권고를 중심으로 한 유연한 등록 제도가 도입되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문화유산이 보호와 관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필름은 그동안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으나, 2007년 한국영상자료원이 극영화 필름을 처음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등록된 작품은 1936년 제작된 ‘미몽(죽음의 자장가)’과 1956년 ‘자유부인’ 등 7편으로, 한국 영화사의 다양한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었다. 이후에도 2012년 ‘청춘의 십자로’가 등록되며 영화 필름의 역사적 가치를 점진적으로 인정받아왔다. 이번에 새롭게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추가 등재된 4편의 영화는 그 의미를 더욱 확장시킨다. 
이번 2024년에 문화재로 선정된 영화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한국영화사 혹은 한국문화사의 중요한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 영화들은 당대의 민감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고,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작품이기도 하며, 당대 한국인들의 생활과 삶을 충실하게 담아낸 작품이기도 하다. 다만 후보작 중 원본 필름이 아니라는 이유로 <오발탄>이 선정에서 제외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러면 영화별로 간단히 그 역사(영화사)적 의미와 가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낙동강> 스틸사진

<낙동강>(전창근, 1952)
한국영상자료원이 2022년에 복원, 공개하였다. 한국전쟁기에 제작된 영화는 총 14편으로 알려져 있으나, 영상자료원이 보존하고 있는 영화는 <낙동강>을 포함한 3편에 불과하며, 그나마 음향과 이미지의 유실 없이 온전한 영화는 <낙동강> 한 편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의미의 극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 혹은 소위 “문화영화”라는 장르에 가깝다. 서사보다는 윤이상이 작곡한 음악을 주된 테마로 하며, 거기에 낙동강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낙동강의 역사, 전쟁의 발발, 남편의 참전, 전투와 희생, 귀향, 희생자에 대한 진혼, 복구의 모티브들이 배치되었다. 일종의 교향시 영화라 할 수 있다. 윤이상 전문가인 김원철(통영국제음악재단)에 따르면 영화에 쓰인 음악은 윤이상의 미발표 관현악곡 ‘낙동강의 시’와 유사하다고 한다. 낙동강 인근 남한 민중의 삶을 담은 상징적 이미지들은, 이들의 삶을 민족사적 관점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은유로 느껴진다. 감독 전창근, 시나리오를 맡은 이은상, 음악의 윤이상, 무용의 조용자 등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창작적 재능이 집약되었다는 점 역시 가치를 더한다.


 
<돈> 스틸이미지

<돈>(김소동, 1958)
한국영화사를 통틀어 농촌 경제의 현실을 <돈>과 같이 적나라하게 고발한 작품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대단한 역사적 사건을 무대로 올리는 것은 아니다. 그저 농촌의 한갓진 한 동네, 순박한 주민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영화는 선량한 인물들이 어떻게 가난으로 인해 타락하고 망가지는가를 집요하고 현실적이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때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피폐한 농촌의 현실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가난하지만 순박했던 농민들의 마음에 자본주의의 감각이 도입되면서 스스로의 비참을 실감하고, 자제할 수 없는 물욕에 사로잡혀가는 과정이다. <돈>이라는 제목은 그것을 상징한다. 단순히 농촌 현실을 넘어 1950년대 한국사회의 진면목을 영화적으로 성찰해 낸 걸작.


 
<하녀> 스틸이미지

<하녀>(김기영, 1960)
이 영화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필요할까? 어느샌가 <오발탄>이 독점하고 있던 한국영화 걸작 1위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2024년 한국영상자료원 조사에서는 결국 넘어서 버렸다. 한국영화사, 세계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개성적인 감독이라 지칭해도 무리가 아닐 만큼 기괴한 영화세계를 보여준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이다. 최근 봉준호, 박찬욱 감독들의 오마주 발언을 통해 세계적으로도 알려져,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영화 중 한 편이 되었다. 기괴하지만 아름답고, 1960년 작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촬영과 편집이 돋보인다. 현재 디지털 판본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주관했던 세계영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복원한 것이다.


 
<성춘향> 스틸이미지

<성춘향>(신상옥, 1961)
<성춘향>은 여러모로 한국영화사에서 의미가 깊다. 1960년에서 1961년 사이, 춘향 이야기는 두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당대의 라이벌 감독 신상옥과 홍성기, 그들의 부인이었던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와 김지미가 짝을 맞춰 경쟁했다. 아마도 한국영화사 통틀어 가장 소란스러웠던 이 경작 소동은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 영화는 홍성기의 <춘향전>과 함께 한국영화사의 첫번째 칼라 시네마스코프 영화라는 기술적 이정표를 세웠다. 신상옥은 첫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칼라 시네마스코프의 장대한 화면 속에 조선시대의 풍속과 풍경을 탁월하게 재현해 낸다. 1961년 설날 공개되어 서울 개봉관에서 36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이 기록은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정소동)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 영화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이후 한국영화계의 절반이라고까지 불렸던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름이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는 이 <성춘향>의 흥행성공과 함께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