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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빅 토크를 잘할 수 있을까요? 2025.03.05 339
“제가 빅 토크를 잘할 수 있을까요?”
스몰 토커(small-talker) 오성지 프로그래머의 로테르담 영화제 기행기
 
글: 오성지(한국영상자료원) 

로테르담 영화제 big talk 현장

* 로테르담 영화제 Big Talk 현장 이미지 (제공. 로테르담 영화제)

“네, 할게요!” 생각도 안 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성격이 꽤 소심한지라 내가 잘 모르고 부담이 될 것 같은 요청은 항상 거절하는 편이나 이 문의에는 그냥 하겠다고 했다. 전설적인 이 감독님과 무대에서 필름 아카이브에 관한 이야기를 같이하다니, 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을까 싶었다. 이미 베를린 영화제에 갈 비행기 표를 구매해 놓은 상태이기는 하나 영화제에서 숙소와 비행기 푯값의 일부를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영화제라 두 영화제를 다 갈 수는 없었다)
 
이 전설적인 감독님은 바로 코스타 가브라스로 국내에는 < Z >(1969), <계엄령> (1972), <뮤직박스>(1989)로 알려져 있고 1982년부터 1987년까지 그리고 2007년 이후 현재까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원장으로 <나폴레옹>(아벨 강스, 1927) 복원 프로젝트를 수년간 진행하셨으며, 최근에는 제임스 캐머런 전시를 주관하시기도 했다. 베를린 영화제보다 규모는 작지만 젊은 영화감독들의 독창적인 영화를 선보인 로테르담 영화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80여 km 떨어진 곳에서 1월 말에서 2월 초에 열리는 국제 영화제이다. 홍상수 감독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 박찬옥 감독님의 <질투는 나의 힘> (2003)이 타이거 상을 받았고 박찬욱 감독님의 <스토커>와 봉준호 감독님의 <기생충> 흑백판이 감독님들의 소개로 상영되기도 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KBS 모던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환인 <코리안 드림, 남아진흥 믹스테이프>가 초청을 받았고 다수의 아시아 영화가 상영되었다.
 
Big Talks 프로그램 안내
* 로테르담 영화제 Big Talk 프로그램 안내 (출처. 로테르담 영화제 홈페이지)


그러나 막상 수락하고 일정이 확정된 후 구체적인 내용을 들어보니 여러 명의 패널이 아니라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님과 둘이 대담하는 프로그램이고 시네마테크 스위스 원장인 프레데릭 메어가 진행한다는 거다. 그리고 토크 제명이 “Big Talk”라고 한다. 영어로 스몰 토크는 곧잘 해도 영어 원어민도 아니고 게다가 거장 감독과 “빅 토크”라니! 과연 내가 ‘빅 토크’를 잘할 수 있을까? 한국 사람들의 기본인 영어 울렁증이 몰려오고 무대에서 가끔 일어나는 눈앞이 하얘지고 모든 생각이 얼어붙는 그 순간이 찾아들 것 같은 두려움에 아, 괜히 “Yes”를 했나, 후회감이 몰려들었다. 게다가 로테르담 영화제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다른 ‘빅 토크’ 참여자가 케이트 블란체, 미케 다카시 같은 유명인들이다. 프로그램 담당자인 니나와 진행자인 프레데릭에게 어떤 내용이 논의 될지 답을 받은 것은 출국 사흘 전이었다. 다행히 대담의 주제인 필름 아카이브의 미래, 디지털 환경으로 전환되면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점, 젊은 관객을 시네마테크로 유입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고전영화 복원의 필요성은 영상자료원에서 몇 년 이상 근무한 직원이라면 한 번쯤 고민하는 문제라서 생각을 정리하기는 수월했다.
 
대담이 2월 2일 일요일 오후 2시 30분이라서 하루 전인 토요일 오전에 로테르담에 도착해 영화제 패스를 받으러 갔는데 우연히 니나를 만나 행사장을 미리 점검할 수 있었다. 영화제의 토크는 ‘빅 토크’와 ‘타이거 토크’ 두 가지 종류로 진행되는데 이름이 ‘빅 토크’여서 그런지 300석이 넘는 큰 행사장이었다. 이쯤 되니 ‘뭐, 어떻게 되겠지!’ 싶었고 1933년으로 올해 92세이나 아직도 영화를 만드시는 가브라스 감독님을 만난다는 데 의의를 두고 마음을 편하게 갖자고 다짐했다. 당일 행사장에 가니 와! 빨간 양말을 신고 오신 가브라스 감독님, 어떻게 저렇게 활동적일 수 있으신지! 박찬욱 감독님의 새 영화 <어쩔수가 없다>(미국 소설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가브라스 감독님이 <더 액스>(2005)로 만드셨다) 의 소식을 전하자, 사모님과 함께 반가워하셨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어른의 부재>라는 신작으로 참석하셨고 영화제 기간 박찬욱 감독님과 오픈 토크도 진행하셨기 때문에 한국이 낯선 곳은 아닌 듯 했다. 항상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라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프랑스어 번역본을 선물로 드렸다. (읽으셨을까?)
 
로테르담 영화제 Big Talk 현장

* 로테르담 영화제 Big Talk 현장 이미지 (제공. 로테르담 영화제)

그러나, 대담은 다소 아쉽게 끝났는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나폴레옹> 복원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가 홍보 트레일러와 함께 20 여분이 넘게 이어지더니 진행을 맡은 프레데릭마저 본인의 기관 홍보를 시작하는 거다. 아날로그 환경에서 디지털 환경으로 전환되면서 발생하는 여러 이슈(디지털 저장매체의 짧은 수명, 아날로그 필름 보존 및 상영 기술 전수, OTT로 인한 극장 관객 감소, 그리고 AI 복원까지)를 논의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유럽의 역사 깊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1936년에, 시네마테크 스위스는 1943년에 설립되었다) 시네마테크의 다소 장황한 홍보에 당황했고 보다 실질적이고 비관적인 현실을 혼자 이야기한 꼴이 되었다. 행사장을 나오면서 밀려드는 자괴감! 우리 자료원의 디지털 아카이빙은 보수적인 국제 필름 아카이브 연맹 회원사(FIAF)들이 결론 없는 토론만을 할 때 이미 시작되었고, 일찍이 유튜브라는 플랫폼을 이용해 한국 고전영화를 소개했는데 너무 냉소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은 아닌지, ‘빅 토크’라는 프로그램명처럼 구체적인 문제와 해결 방안은 언급이 안 되고 그냥 ‘빅 이슈’가 겉핥기처럼 논의된 것은 아닌지! 역사 깊은 유럽 아카이브의 연세가 지긋한 수장과 아시아 아카이브의 젊은(가브라스 감독님과 비교하면) 직원의 다른 배경과 입장이 흥미로운 논의를 끌어내리라 생각했는데 여러모로 아쉬운 대담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