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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을 지지했다. 우린 모두 친구였다. 2025.03.05 778

“나는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을 지지했다.
우린 모두 친구였다.”

다큐멘터리스트, 영화학자, 그리고 대만 뉴 웨이브 동시대인
도밍 리 국립 타이페이 예술대학 교수 인터뷰


글: 배동미(씨네21)
사진: 최성열(씨네21)


대만 영화 학자 도밍 리


도밍 리(道明 李, Daw-Ming Lee)는 에드워드 양, 허우 샤오시엔 등 대만 뉴 웨이브 감독들과 금마장 시상식에서 늘 함께 호명되던 다큐멘터리스트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그는 <비정성시> <공포분자> <결혼 피로연>이 그해의 영화로 지명될 때 대만 원주민과 환경운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금마장 시상식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여러 번 수상했다. 그렇다고 그의 정체성을 다큐멘터리로만 한정지을 순 없을 것이다. 국립 타이페이 예술대학 교수로서 대만 영화사를 기술하는데 사력을 다했으며, 제목부터 무게감이 상당한 『Historical Dictionary of Taiwan Cinema란 두꺼운 서적을 펴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었으나 추위가 여전해 옷깃을 여미던 2월17일, 빌딩숲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상암동에서 백발의 대만 영화학자 도밍 리를 만났다. 친절한 미소를 띤 그는 일제강점기에 대만 영화와 조선 영화의 차이점에 관해 학자로서 명쾌하게 분석하면서도 1980년대 대만 뉴 웨이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만 영화의 ‘지금’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대만 감독들의 작품과 경향을 짚었다.


이번에 어떤 이유로 한국을 방문했나.
대만영화시청각센터(Taiwan Film and audio visual institute, TFAI)의 의뢰를 받아 연구 목적으로 4박5일에 걸쳐 한국영상자료원에 방문했다. TFAI는 한국영상자료원의 정책과 디지털 작업에 관심이 있는데, 특히 여러 곳에 퍼져있던 영상 자료를 상암과 파주로 옮겼던 경험에 주목하고 있다. 기존 TFAI 건물 옆에 새 건물이 세우고 박물관과 보관소가 열 예정이라 기존 컬렉션들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신임 TFAI CEO는 기존 업무들이 효율적이지 못했다고 판단해 새 정책과 새로운 워크플로우를 만들 목적으로 이곳 직원들과 인터뷰하길 내게 요청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아 10명 넘는 직원들과 인터뷰했고 그들의 헌신과 효율적인 업무 능력에 큰 감명을 받았다. 많이 배웠다.


한국은 몇 번째 방문인가.
아주 오래 전 광주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 방문했다.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 열린 아시아 시네마 연구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끝나고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들렀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1970년대 대만국립대학 재학 시절 영화제를 열고 프로그램 노트를 쓴 계기로 <인플루언스(Influence)>란 잡지에 글을 쓰셨다.
1971년 대만국립대학에 입학해서 친구들과 학교 안에 시네클럽을 만들었다. 당시 다른 대학에는 시네클럽이 있었지만 대만국립대학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대만엔 유럽 예술영화들을 수입하는 수입사가 없었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화가 소프트 포르노로 위장돼 들어왔다. 아주 소수만 걸작이란 걸 알았다. 시네클럽 친구들과 이런 영화들을 수급해서 캠퍼스나 개인 영사실에서 상영했고 이런 움직임은 시네필 문화로 이어졌다. 나는 시네클럽에서 리뷰와 비평을 쓰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당시 대만 유일의 영화 잡지인 <인플루언스>에 발탁됐다. 참고로 <인플루언스>는 외화와 해외 예술 영화를 진지하게 소개하고 이론과 비평 기능이 있는 격월간지였다. 동시에 나는 영미권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 <필름 코멘트(Film comment)> <필름 쿼터리(Film Quarterly)>의 기사를 읽으며 영화를 배워 나갔다. 영문으로 쓰였든 한문으로 쓰였든 영화 책이라면 다 탐독했던 것 같다. 그렇게 1972년 아직 1학년생이던 시절 <인플루언스> 에디터가 됐고, 1974년 무렵 수석 에디터에 올랐다. 1975년부터 해군에서 2년간 복무한 뒤 제대 후에 다시 <인플루언스> 수석 에디터 일을 시작했다. 내가 군에 있는 동안 잡지가 파산하면서 잡지를 부흥시킬 목적으로 새로운 에디터들과 함께 ‘대만의 새로운 영화감독’이란 주제로 10개의 스페셜 에디션을 발행했다.

여담이지만 새 에디터 중 한 명은 후에 유명 영화감독이 된 장이 감독이다. 기혼이었던 장이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로레타 양과 염문에 휩싸였는데, 유명소설가인 그의 아내 샤오샤는 이에 대한 소설을 쓰자 장이 감독이 이를 다시 영화화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이로 인해 장이 감독과 배우 로레타 양은 영화계를 떠났고 결혼 후 상하이에 정착해 유리 공방을 세워 크게 성공했다. 후에 에드워드 양이 병으로 대만을 떠났을 때 장이 감독이 상하이에서 그를 돌보았다. 에드워드 양 감독뿐 아니라 2000년대에 대만을 떠난 많은 영화감독들을 장이 감독이 참 많이 도왔다.


Daw-Ming Lee
 

“1970년대는 대만 영화의 암흑기다"


1970년대를 “어두운 시기”였다고 회고한 대만 언론과의 인터뷰를 보았다. 활발하게 시네 클럽을 운영하고 <인플루언스> 수석 에디터까지 지냈던 1970년대를 왜 어둠으로 정의하나.
1967년에 개봉한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이 예상을 뛰어넘어 크게 히트했고 대만 박스오피스 기록을 갈아치웠다. <용문객잔>은 대만 뿐 아니라 홍콩과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크게 흥행했다. <용문객잔>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무술 영화가 등장했고 대만 박스오피스는 무술 영화 일색이었다. 그리고 1971년과 1972년에는 이소룡의 <당산대형>과 <정무문>이 히트했다.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대만은 1971년 국제연합(UN)에서 대표권을 잃었고 일본은 대만 내 일본대사관을 철수하는 경험을 겪었다.(1971년 전까지 공산권에 반대하는 서구권에 의해서 대만이 UN에서 중국 대표권을 행사했다. 1971년 10월 UN 결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대표권을 얻게 되었다. -편집자) 그때 마침 쿵푸 마스터 이소룡이 쌍절곤으로 일본과 서구로부터 소외당한 대만 관객에게 따뜻하게 다가갔던 것이다. 정치적 상황과 영화가 우연하게 맞아떨어졌다.

1970년대 대만의 정치적 상황이 나빠지면서 미국을 제외한 많은 국가들이 대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만 정부는 일종의 반일, 반공을 영화 정책으로 삼았고 1980년대까지 이런 기조가 이어졌다. 국민당이 소유한 대만중앙영화공사(Central Motion Picture Corporation, CMPC)는 이런 정책 하에 비슷한 결의 영화를 많이 만들었으나 1970년대 말 즈음부터 반일, 반공 영화의 성적이 점점 저조해졌다.(CMPC는 1954년 설립된 대만 유일의 종합 영화 제작사였다. 국민당 통제 하에 운영되다가 2005년 천수이벤 총통에 의해 민영화됐다. -편집자) 

1970년대에 유행한 또 다른 장르는 가족멜로드라마다. 유명 작가인 경요의 작품을 각색한 것들이 특히 유행했다.(경요 작가는 국내에서도 인기였던 TV 드라마 <황제의 딸> 작가로 유명하다. -편집자) 경요 작가의 작품은 그 자체로 장르와 같았고 ‘경요 필름’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런 트렌드도 반복되자 관객들이 싫증을 느꼈다. 1978년에 들어서면 무술영화, 쿵푸영화, 민족 정치 영화, 가족멜로드라마 모두 관객에게 외면당했다.


쿵푸영화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대만에서는 1978년 전까지 쿵푸영화가 얼마나 인기였던지 1970년대에 배우들은 영화 여러 편을 강제로 찍어야 했다. 이때 갱스터들이 대만 영화계에 등장하게 된다. 제작사들은 총칼을 동원해서라도 배우들이 영화를 찍길 원했고, 그 결과 갱스터 무리가 영화계에 들어오게 된다. 1970년대 말에는 갱스터들이 직접 제작사를 차려 섹스 플로이테이션 영화를 만들고 마약과 도박, 복수, 강간을 플롯으로 삼았다. 특히 강간당한 여성들이 다시 복수를 감행하는 영화들이 1970년대 말에 일시적으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영화감독들이 더는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아 하면서 이런 경향은 대만 영화계에서 사라졌다.


귀여운 여인(Lovable You) 포스터  동동의 여름방학 포
출처. 왓챠피디아

대만 뉴 웨이브의 서막


1970년대 어두운 시기를 지나 대만 뉴 웨이브가 출현한 것이다.
1978년 이후 관객들이 이전까지 유행하던 영화를 외면하고 아직 대만 뉴웨이브가 태동하기 전 허우샤오시엔과 촬영감독 첸 쿤호우는 가벼운 음악 영화 <귀여운 여인>(1980)을 만들었다. 레코드 회사의 투자로 새로운 음악 영화인데 레코드사는 홍보하려는 가수를 내세우려 하면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메인 캐릭터들을 실제 가수들로 캐스팅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1982년 대만 뉴웨이브 영화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자신만의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었다. 언급한 1970년대 대만 상업영화들이 쇠락한 건 홍콩 뉴웨이브가 출현한 까닭도 있다. 1970년대 홍콩 뉴 웨이브 영화가 바다 건너 대만에 전해졌고 대만 관객은 홍콩에서 발현된 새로운 유형의 영화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자국의 영화보다 흥미로운 작품이란 걸 바로 알아차렸다. 동시에 홍콩 뉴 웨이브 영화는 대만의 젊은 영화감독들도 영향을 받아 현실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잘 되진 않았지만 CMPC가 대만 뉴 웨이브에 박차를 가하기 전부터 젊은 영화인들 스스로 홍콩 뉴 웨이브와 비슷한 영화를 소망한 것이다.


대만을 떠나 6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고 1984년 귀국했다. 마침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동동의 여름방학>이 개봉한 해다. 1984년 대만은 어떠했나. 70년대에 떠나 다시 돌아온 대만인의 눈에 1984년 대만은 달랐나.
정말 달랐다. 정말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우선 민주화가 일어났다. 장제스 총통의 아들인 장징궈 총통이 건강이 악화되자 중국 본토로 돌아가 통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인식하고 마침내 정치 민주화에 돌입했다. 먼저 지역과 섬 전체에서 공해 방지 및 환경 운동을 허용했고, 계엄령에 따라 반역죄였던 중국의 참전용사들이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고향에 가는 게 가능해졌다. 1986년 야당인 민주진보당이 결성되고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민주화는 절정에 달했다. 계엄 해제 후 신문, 저널, 지상파 및 위성 TV, 케이블 등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더 이상 중국 본토로 돌아갈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국민당은 대만을 본거지로 삼아 경제를 발전시켰고, 대만의 경제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면서 대만은 한국, 홍콩,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 불렸다.

나 자신은 1978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내가 연출하고 싶은 영화와 대만 영화계 사이에 격차가 있어 대만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겠다고 판단해서 떠난 유학이었다. 그러나 1982년 CMPC가 대만의 신인 감독들에게 영화 제작을 맡기며 대만 뉴 웨이브가 시작됐고 CMPC로부터 귀국해 영화를 연출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학위를 마치지 못해서 2년 뒤인 1984년에 대만으로 돌아왔다. 1985년 말레이계 중국인이 쓴 대만소설을 바탕으로 한 극영화를 연출하기로 CMPC와 계약했는데, 원작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일제강점기 시대 말레이시아를 다룬 진지한 소설이었다. 시나리오도 완성됐으나 알맞은 로케이션을 찾지 못해 제작이 무산됐다. 세트를 지어 촬영하기에는 제작비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CMPC는 1986년 옴니버스 영화로 묶일 단편영화 연출을 제안했고 40분 분량의 단편영화로 만들어져 1988년 극장 개봉했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 대만 영화 스타일의 영화가 제작되길 바랐고 그런 영화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극영화 연출을 그만두고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9년 제작사를 설립하고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와 TV 다큐멘터리 제작하기 시작했다.


Daw-Ming Lee


대만 뉴 웨이브의 물결 속에 만나다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의 난민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 Beyond the Killing Fields >로 1986년 금마장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같은 날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작품은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공포분자>이다. 또 직접 연출한 < Voice of the People >이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한 1991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로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대만 뉴웨이브 감독과 시상식에서 늘 함께 호명됐고 그들과 동시대에 활동했다. 당신이 기억하는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고,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나.
우린 모두 친구 사이였다. 미국 유학을 다녀왔거나 그렇지 않거나 구분하지 않고 젊은 영화감독들은 이미 대만 뉴 웨이브의 물결 속에서 만났고 서로 잘 알고 지냈다. 참고로 1985년 내가 금마장 시상식 심사위원을 맡았을 때 심사위원들 사이에 ‘안티 허우 샤오시엔’ 정서가 있었다. 허우 샤오시엔의 새로운 영화들이 관객의 외면을 받으면서 대만 박스오피스 자체가 쪼그라들었다는 게 ‘안티 호우 샤오시엔’ 움직임의 근거였다. 나는 여기에 맞서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을 지지했다. 대만 제작사 대부분이 홍콩 영화가 큰돈을 벌어준다고 생각해서 홍콩에 제작사를 세우고 홍콩 감독들을 고용했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자 도리어 대만 감독들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일부 영화 비평가들과 정부 역시 이런 비난에 동조했다. 1987년 대만 뉴웨이브 선언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1987년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을 포함한 젊은 대만 영화감독 54인은 이른바 '대만 뉴 웨이브 선언'을 발표했다. 대만 정부가 문화보다 정치적 선전과 상업성에만 관심이 있다고 지적하고, 대만 영화가 홍콩과 할리우드 영화를 따라야 한다고 평론가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내용이 담겼다. -편집자)


기존 대만 영화와 구분되는 대만 뉴 웨이브 영화만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전까지의 대만 영화들은 실제 사람들과 실제 환경을 다루지 않았다. 1960~1970년대에 경요 영화라 불린 멜로드라마는 거실, 커피숍, 댄스홀 세 장소만 로케이션으로 삼는다고 하여 ‘쓰리 로케이션 시네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반면 대만 뉴 웨이브 감독들은 진짜로 벌어지는 상황에 관심을 두었다. 홍콩 뉴 웨이브에 영향을 받아 리얼리즘을 추구하려 했다. 이 신진 감독들이 만든 결과물이 흥미진진한 서사를 다루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조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점이 대만 뉴 웨이브가 기존 대만 영화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들은 저예산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초기인 1982~1984년 경에는 CMPC에 이윤을 남겼고, CMPC도 이런 새 트렌드에 만족했다. 그러나 1985년 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스토리>가 흥행에 실패하고 오직 3일간 극장에 걸렸다. <타이페이 스토리>는 허우 샤오시엔이 제작한 작품이자 직접 주연배우로 출연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금마장 시상식 심사위원 회의에서는 <타이페이 스토리>의 흥행 실패가 대만 영화의 하락세를 가져왔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금 우리는 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스토리>를 걸작이라고 여기지만 당시엔 정말 박한 평가를 받았다.


리얼리즘과 인간의 조건에 대한 관심 이외에 또 다른 특징은 무엇인가.
흥미진진한 플롯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대신 일반 사람들의 삶과 같은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는 것. 그래서 처음 대만 뉴 웨이브 영화들이 공개되었을 때 일반 관객들도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대만 뉴 웨이브 영화들은 상업적인 요소가 없고 상업적인 고려가 전혀 없는 작품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대만 뉴 웨이브 감독들은 영화를 가지고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기술하고, 소설을 짓고, 에세이를 쓰려한 사람들이다. 대만 뉴 웨이브 감독들은 작가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스스로 작가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관객을 배려하지는 않았다.



Daw-Ming Lee
 

대만 영화학자 눈에 비친 한국 영화

 
대만 영화 연구자로서 현재 가장 충실하게 연구하는 분야는 무엇인가.

대만 영화사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대만 영화에 관심이 크다. 이미 Historical Dictionary of Taiwan Cinema라는 책을 펴냈지만 최근 발견된 새로운 정보를 모아서 보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2~3년 후에 개정판이 나올 것 같다.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랑 비교했을 때 그 시기 대만 영화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나.
정종화 학예연구사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은 20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기술한 글을 보고 놀랐다. 대만 영화계는 일제강점기 통틀어 3~4편의 영화만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영화의 제작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대만인들은 1940년대 초까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런 차이는 큰 변화를 낳았다. 그 시기 대만 영화인들은 기술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량을 갖추지 못했고 오직 영화를 감상하고 책을 읽는 방식으로만 영화를 공부했다. 일제강점기 대만 영화 중 몇 개는 심지어 대만에 사는 일본인들에 의해 제작됐다. 대만인들이 만든 영화는 적었고 1950년대가 되어서야 대만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첫 작품이 나왔다.


대만 건강리얼리즘에 속하는 <굴 따는 처녀>라는 작품을 본 적 있다. 그때의 작품인가.
그건 CMPC에서 1960년대에 만든 만다린 영화다. 내가 말하는 건 진짜 대만어로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국민당이 대만어 영화 제작을 금지한 건 아니지만 제한을 두었고 만다린 영화를 더욱 권장했다. 당시 대만 사람들은 집에서는 대만어를 말할 수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만다린을 말해야 했다. 1950년대 정부는 만다린 시네마를 강하게 권장했고 이것이 금마장 시상식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 시기에 홍콩에서 만다린 영화들이 만들어졌는데 대만 정부는 이들 영화에 상을 주면서 홍콩 영화인들이 사회주의 중국보다 대만의 장제스 정부와 가까워지길 바랐다. 참고로 금마장 시상식은 ‘금빛 말’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금은 진먼 현(金門縣, Kinmen Island), 마는 마쭈 열도(馬祖列島, Matsu Islands)에서 따왔는데, 모두 중국 해안가의 두 섬이다.(진먼 현은 중국 대륙에서 불과 1.8km의 거리로 매우 가깝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가까운 마쭈 열도와 함께 진마 지구(金馬地區)로도 불린다. 현재 마쭈 열도는 대만 정부가 통치하고 있으나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편집자) 대만은 금마장 시상식을 반공 정서의 거점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마이 미씽 발렌타인 포스터  친애하는 세입자 포스터
괴짜들의 로맨스 포스터  미국소녀 포스터

출처. 왓챠피디아


학자로서 한국 영화사의 어떤 시대를 가장 주목하나.

최근 들어 한국 영화가 정말 강세이다. 특히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과 아카데미를 석권한 <기생충> 이후 대만에서도 한국 영화를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한류 이후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강세를 보이고 있다. 어젯밤 김홍준 영상자료원장과 소극장이 많은 대학로를 찾았는데 정말 감명 깊었다. 한국에는 이렇게 작은 연극 무대가 발달해 있고, TV드라마와 영화도 여전히 강하다. 그리고 K팝도 있다. 한국에는 연극과 영화와 K팝을 지지하는 문화가 있지만 대만엔 없다. 대만의 인구는 한국의 약 절반이지만 가장 인기 있는 영화도 관객수 100만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만큼 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이 적다. 이 때문에 대만 영화가 해외 시장 없이는 자생하기 어렵다. 그리고 알다시피 현재 대만 영화를 원하는 해외 시장도 없다. 대만에서는 매해 50편 아래의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그 마저도 대부분 정부 기금으로 제작된다. 그중 2편 정도만 돈을 벌고 있는 실정이다. 대만 영화인들은 경제적인 토대가 없다는 걸 가장 걱정하고 있다.


한국 시네필들은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특별히 사랑하고, 대중적으로는 대만 청춘영화가 인기를 끈다. 대만 뉴웨이브와 청춘영화 이외의 대만 영화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스트이자 학자의 관점에서 한국 관객이 주목했으면 하는 시기의 대만 영화나 특별한 사조가 있다면 들려달라.
청몽홍, 진굉일, 장초치, 린슈유, 양야체 감독의 영화를 추천한다. 천위쉰 감독의 <마이 미씽 발렌타인>, 청유치에 감독의 <친애하는 세입자>, 랴오밍이 감독의 <괴짜들의 로맨스>, 롼펑이 감독의 <미국 소녀>도 알려주고 싶다.(언급한 작품들은 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됐지만 개봉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넷플릭스에서는 대부분 시청할 수 있다. -편집자)


이 감독들의 영화는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
그들의 비전을 상업적인 요소와 섞는다는 점. 언급한 감독들은 연출자로서 자의식이 강한 차이밍 량과 같은 이전 세대 감독들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 드라마를 쌓아가는 3막 구조에 능하고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상업적인 요소를 섞으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메시지를 관객에게 분명하게 전한다. 이들 대만 영화인들에 주목하고, 언급한 대만 영화들을 감상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