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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아카이브에서 영화책을 만든다는 것 2025.03.05 463
필름 아카이브에서 영화책을 만든다는 것
‘KOFA 영화비평총서’의 발간을 알리며

글: 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상자료원의 새로운 발간 시리즈인 ‘KOFA 영화비평총서’가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선보이고 있다. 날이 갈수록 영화책 시장이 위축된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반응이 좋아서 독자들께 무척 감사한 마음이다. 이 시리즈는 한국영상자료원의 기관 5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프로젝트로 나왔다. BFI Film Classics 시리즈를 레퍼런스 삼아 장기간 머릿속에서 고민만 해왔던 일인데,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근사하게 현실화시킬 수 있었다. 

사실 한국영상자료원(KOFA)은 출판사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기관의 원장은 관련 협회에 등록이 필요한, 영화박물관, 시네마테크KOFA, 영상도서관의 대표이기도 한 시스템인데, 출판사 역시 그렇다. 출판사 KOFA가 영화인 네트워크와 맞물려 영화영상 관련 도서를 활발하게 발간한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책 만들기는 정부의 감축 예산 기조라는 제약 앞에 가장 부침을 겪는 사업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면, ‘KOFA 영화비평총서’가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실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해 드리려면 20년 전으로 돌아가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KOFA의 20년, 책으로 쌓아온 시간

2024년은 기관 50주년이기도 하지만 한국영상자료원 내부 조직으로 연구발간 부서가 만들어진 지 20년을 맞은 해이기도 했다. 우리 기관이 본격적으로 책을 만들겠다고 다짐한 지 20년이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필자는 연구자 출신의 첫 원장님이 부임한 직후 한국영상자료원이 첫 책을 만드는 작업에 참가하기 위해 입사했고, 『씨네21』초대 편집장 출신의 원장님 재임 기간 동안 혹독하게 책을 만들었으며,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은 2019년부터 대학 영화과 교수셨던 원장님과 책 작업을 살려내, 역시 영화과 교수셨고 영화감독이신 원장님과 새로운 시리즈 기획까지 이어냈다. 발간을 담당한 첫 실무자부터 지금의 기획하고 편집하는 역할까지 필자가 영상자료원의 영화책 만들기에 가장 깊게 관여한 직원 중 한 명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필자와 조준형 선임연구원(첫 연구부장) 등 내부 연구원들이, 출판사 KOFA의 정체성으로 영화학계의 연구자 동료들과 함께 만든 책은 이런 것들이다. 

2003년 발간된 『한국영화의 풍경 1945-1959』을 시작으로, 자료총서가 뻗어나갔는데 2004년부터『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 시리즈, 2008년부터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2010년부터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차례로 기획하고 발간했다. 말 그대로 한국영화사 연구의 밑거름이 된 책들이다. 2004년에는 22명의 원로영화인을 구술채록하고 편집해 그해 바로 구술총서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까지 무리했을까 싶은데, 한국영화사 연구 기반이 되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사 초기의 조바심과 의욕이 앞섰던 때였다. 지금은 구술사 담당인 이수연 연구원이 연계된 책까지 잘 진행하고 있다. 이때 연구총서 『한국영화사 공부』시리즈는 물론, 이 책의 영문 번역서까지 나왔다.  

한국영상자료원 발간물 모음

2007년에는 우리가 포켓북이라 부른 『필름스토리 총서』를 론칭했다. 1권이 필자가 쓴 『한국영화사-한 권으로 읽는 100년』이었는데, 6개월 넘게 주말을 반납하고 집필해 ‘그해 발간’이라는 마감 원칙을 맞췄던 기억이 난다. 쓰는 고통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동시에 6명의 필자를 관리하며 일곱 권의 편집자 역할을 했던 일이다. 개인적으로 책 만들기를 훈련받는 스파르타의 시간이었다. 당시 원장님의 글쓰기와 편집에 대한 가르침은, 자다가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을 신진 연구자였던 필자에게 믿고 맡겼던 배포 역시. 하지만 그때는 지금 지면에 다 쓰지 못한 버라이어티한 일들로 ‘힘들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애증의 발간에 지친 필자가 교토대 연구 휴직을 택한 사이 동료들이, ‘문화영화’, ‘기록영화’, ‘검열’, ‘극장’ 등 영화사 서술의 빈곳을 메우는 중요한 책들을 또 묵묵히 만들었다. 그리고 2017년 『은막의 사회문화사』를 마지막으로 종이책 작업이 멈추게 된다. 결정적인 이유는, 팔리지 않은 책들이 기관의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100년을 맞은 2019년, 휘발되고 마는 전시성 이벤트보다 좋은 책 한 권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필자는,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실무를 맡아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산 지원을 받아 학계 선후배들과 『한국영화 100년 100경』을 기획했다. 다시 종이책 작업을 했다는 의미도 컸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책 작업이 발상의 전환이 되어준 것 같다. 영상자료원은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전문적인 출판사가 대신 책을 제작해줄 수 있다면. KOFA의 영화 분야에 대한 기획력과 전문성은 유지하고 예산은 원고료 선에서 최소화할 수 있다면. 

 

뜻이 있는 곳에 '책'이 있다, 좋은 출판사를 만나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국영화사 콘텐츠를 대중적인 톤에 맞춰 전문적인 필자들이 쓰겠다는 내 기획서를 저명 출판사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평론가들의 평론집도 아니었으니까. 편집장을 알거나, 편집자를 알거나, 지인 찬스까지 써봐도 위축 일로인 출판시장 탓에 다들 한국영화사 책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마지막으로 전화해 볼 곳은 남겨둔 상태였다. 미 국립문서기록청에서 발굴한 사진과 문서자료들로 재구성한 『첩보 한국 현대사』라는 책을 낸 ‘앨피’라는 출판사였는데, 이 책 작업을 한 출판사라면 우리 책을 받아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작정 대표 번호로 전화를 드리고 기획서를 보냈더니, 두 분 대표님 체제인 출판사에서 무척 짧은 시간 안에 답이 왔다. “같이 하시죠.” 출판사 KOFA 일을 하며 두 번째로 경험한 통 큰 배포.

2020년 말 그렇게 나온 첫 책이 바로 『21세기 한국영화』다. 사실 1950년대 한국영화사부터 내겠다고 하면 안 받아줄 것 같아서, 거꾸로 내려오게 된 시리즈의 첫 권이지만, 좋은 출발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영상자료원은 기획하고 필자를 찾고 원고를 수합하는 일은 물론, 사진 배치까지 콘텐츠 전반을 맡고, 출판사는 대중적인 시선으로 책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체제다. 그렇게 『1990년대 한국영화』, 『1980년대 한국영화』가 이어졌고, 드라마틱하게 많이 팔리진 않았지만 재판을 찍는 정도는 되었다. 앞으로 이 시리즈는 여러 방향으로 확장시킬 계획인데, 영화사 전문 연구자의 단저도 그 중 한 방향이다. 사실 작년에는 『1970년대 한국영화』원고를 청탁할 예산 여력이 없어, 필자의 『표절과 번안의 영화사』로 새로운 시작점을 만들었다. 앞으로 출판사 KOFA가 이미지를 포함해 전문적인 편집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동료 연구자들과 책을 같이 만들 수 있도록,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KOFA 영화비평총서
2023년 한국영화 100선 선정 작업을 진행하고, 24년 그 콘텐츠로 ‘아카이브 프리즘 총서’를 론칭하면서, 영화 한편에 대해 전문적인 필자 한 명이 작은 책을 쓰는 기획이 다시 떠올랐다. 총서라면 적어도 1년에 서너권을 나와야 할 터. 조심스럽게 다시 앨피 출판사에 타진했고, 두 대표님은 “결국엔 다 팔리겠죠”라는 배포 좋은 한마디와 함께 흔쾌히 결정해 주었다. 이렇게 새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KOFA 영화비평총서’를 기획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영화사 연구와 비평 작업의 점접을 만드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한번에 얘기하면 배가 산으로 갈 수 있으니, 필자는 실무자 이수연 연구원, 원장님, 평론가, 기자들을 각기 만나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발간 방향을 이렇게 결정했다. “필자로는 중견, 신진 평론가뿐만 아니라 영화사 연구자도 포함시킨다. 그 접점에서 작업해온 사람은 더 좋다. 비평의 톤은 필자에게 맡기지만, 비평 작업에 아카이브 자료가 타진되고 수용되도록 한다....” 그렇게 시리즈의 첫 라인업은 정성일 선생님의 『휴일』을 1권으로, 남다은 평론가의 『살인의 추억』, 금동현 평론가의 『하녀』, 조준형 박사의 『최후의 증인』으로 구성됐다. ‘비평과 역사의 관점에서 우리 영화 리와인드’라는 태그라인과 함께. 우리는 올해에도 최소한 네 권의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사실 내년 작업분의 필자까지 미리 소통하는 중이다. 역시 영상자료원이 보존 중인 아카이브 자료들을 검토하고 인용해 저자의 비평 작업으로 연결시키겠다는 기준으로 영화를 골랐고, 가장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필자들이 빠짐없이 청탁을 받아주었다. 북미의 Lever Press도 작년 10월부터 ‘Cinemas of Asia’라는 유사한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어, 우리로선 더 자극이 된다. 

우리는 이 시리즈가 한국영화 100선을 모두 책으로 소화해내고 또 같은 영화를 여러 필자들의 관점으로 책으로 내는 것까지 이어지길 기대한다. 100선 이외의 한국영화는 물론, 해외 영화로까지 확대될 날도 기대한다. 그런데, 1년에 네 권씩 만든다면 일단 100선만 소화하는데 25년이 걸리는데.

여하튼 한국영상자료원은 한정된 예산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고 있으니, 이에 감복한 하늘이 어느날 예산 벼락을 내려주길 상상해 본다. 지금 생각하는 저자들이 창작 에너지를 잃기 전에, 젊은 세대는 혹시라도 새로운 일을 찾아 학계나 평단을 떠나기 전에, 더 많은 필자들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뻔한 말이지만 본질임에 분명한 사실 하나만 남기며. “예산과 인력이 더해진다면, 더 잘할 수 있고, 더 좋은 결과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