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보물창고
2023년 기획전시 Ⅰ
씬의 설계
프로덕션 디자인은 한 편의 영화를 시각적 의미로 해석하고 영화 전체의 외양, 즉 비주얼(visual)과 룩(look)을 총괄함으로써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세계관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한국영화는 1990년대 초반까지 연출부에서 세트와 소품 등 미술 작업을 맡아 진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1992년 <그대 안의 블루>(이현승)에서 ‘아트 디렉션 시스템’이 처음으로 도입된 뒤, 영화가 흥행과 미학적 성취를 인정받자 영화 제작 시스템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영화에서도 프로덕션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 그 배경에는 미학적 성취의 중심축을 담당한 프로덕션 디자인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초고화질 디지털 촬영이 일반화되면서 더욱 정교하고 현실적인 재현 요구가 증가하는 동시에 영화의 미학적 성취에 대한 관객의 기대치는 더욱 높아졌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최근 한국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관객은 물론 칸영화제 벌칸상 등을 수상하며 안팎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전시는 현재 한국영화 프로덕션 디자인을 대표하는 류성희, 조화성, 한아름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작업 과정을 통해 프로덕션 디자인이 영화 제작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시나리오와 캐릭터 분석부터 장면 콘셉트와 무드의 설정, 시각적 요소를 구현하기 위한 수많은 디자인과 제작, 시공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활자에서 시작한 영화가 어떻게 영상으로 완성되는지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그들의 작업물 하나하나가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영화의 또 다른 미학을 경험하게 한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프로덕션이라고 하는 ‘제작’, ‘생산’의 의미와 디자인이라는 ‘계획’, ‘설계’의 의미를 내포한다. 산업적 측면과 예술적 측면이 공존한다는 것은 예술적 창조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시각적 요소를 구현하기 위한 제작과 관리 전반 또한 포함됨을 의미한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크게 분석-디자인-제작의 단계로 나뉜다.
분석 단계는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영화의 주제와 메시지를 면밀히 파악하고 캐릭터와 인물 간 관계를 분석한다. 시나리오 속 공간의 특징과 형태, 기능을 파악하고 분류한다. 자료 조사와 연구를 통해 보다 사실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얻음으로써 진실성과 사실성을 높인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 순환됨으로써 이야기와 캐릭터, 공간에 대한 분석은 더욱 두터워진다.
디자인 단계는 크게 공간과 캐릭터로 나뉜다. 주요 장면의 콘셉트를 결정하고 이미지화하기 ‘콘셉트 디자인’을 그리는 것을 그 시작으로 하지만, 3D 그래픽 모델링 작업이 일상화되면서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 전체적인 콘셉트가 결정되면 세트 디자인과 세트 데코레이션 작업으로 설계, 3D 그래픽 모델링, 인테리어, 소품 디자인 등 공간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디자인한다. 캐릭터 역시 전체적인 의상과 분장의 콘셉트를 결정하고 디자인한다.
제작 단계는 세트와 데코레이션, 의상 등 디자인된 모든 요소를 제작, 시공한다. 촬영 전 최종 확인을 위해 테스트 촬영을 진행하기도 하며, 콘티부터 세팅 플랜까지 정리된 데코 보드(아트 보드)를 중심으로 현장을 세팅한다.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미망인과 의심스러운 그녀를 저항할 수 없는 형사. 고전 서스펜스 장르에서 이미 다양하게 변주된 구도이지만, 박찬욱 감독의 독특한 연출과 류성희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감각으로 2022년 가장 큰 화제와 사랑을 받은 작품. 제75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과 대종상, 청룡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백상예술대상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받았다.
평범한 부부의 생활 공간이라는 현실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아파트로 설정했지만, 내부 전체를 목재로 마감함으로써 서래와 남편 기도수라는 인물의 정체성을 부여하려 했다. 클래식 애호가인 기도수의 서재는 기존 아파트와 달리 마치 거대한 음악 감상실처럼 디자인했으며, 서래의 주 공간인 주방은 인물의 생활 양식에 기반하기보다 영화의 시작인 산과 끝인 바다, 그리고 서래와 해준의 관계를 관념적으로 해석하여 디자인했다.
1860년대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동성 로맨스 소설 <핑거스미스>를 1930년대 일제강점기 한국과 일본으로 옮겨와 유럽과 일본, 조선의 생활 양식이 혼합된 새로운 아름다운 세계를 구축한 작품. 류성희 미술감독은 <아가씨>로 2016년 영화 기술 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상으로 평가받는 칸국제영화제에서 선정되는 벌칸상을 수상했으며, LA비평가협회, 청룡영화상, 부일영화상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받았다.
히데코와 숙희가 처음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공간으로 영화 속 가장 중요한 공간. 관념적으로는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되 전체적인 색은 오히려 반대로 차갑지만 고상하면서 순수한 색을 전체 톤으로 설정했다. 여인의 피부 안에 흐르는 동맥과 정맥과 같은 색을 구현하기 위해 특별히 더욱 정교하게 고민하고 색을 선정한 공간이다.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 <명량>(김한민, 2013)의 속편이자 ‘이순신 삼부작’의 두 번째 영화. 195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조선의 운명을 바꾼 한산대첩을 재조명한 작품으로 온 국민이 아는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면모를 조명하고, 임진왜란을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으로 정의함으로써 전쟁의 겉면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심층까지 끌어냈다.
조화성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이순신 삼부작’ 중 <한산: 용의 출현>과 <노량: 죽음의 바다>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았다. <명량>과 차별점을 두기 위해 배에 사용된 목재의 색감과 두께의 견고함 등을 모두 계산하여 몰입감을 높였다. 철저한 고증을 위하여 규장각 사료뿐만 아니라 일본 고서 등도 조사하였다. 하지만 고증보다 더 중요한 점은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프로덕션 디자이너만의 상상력이다. 물량적으로 우세했던 일본군은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반대로 조선군은 소박하고 초라하게 전체적인 톤을 설정해 격차를 둠으로써 영화 후반부 극적인 승리를 더욱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설계했다.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정확히 남아 있지 않다. 2층선 혹은 3층선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며, 부딪쳐 적의 배를 깨는 충파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도 불분명하다. 구형 구선이 탱크와 장갑차 같은 느낌이라면 신형은 기민하게 움직이는 스포츠카와 같은 콘셉트로 설정하여 선체를 더 낮추고 기민하게 움직이도록 했다.
조선군의 판옥선은 무거운 화포를 싣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무겁고 단단한 인상을 줄 수 있게 설계했으며 반면 왜선인 안택선은 조총을 주로 사용하는 일본군의 전략을 반영하여 속도감이 빠를 수 있도록 가볍고 선체의 아래가 뾰족하게 디자인했다.
<길복순>은 ‘평행 지구의 평행 서울’이라는 콘셉트로 영화의 세계관을 설정함으로써 서울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규모의 킬러 회사가 존재한다는 스토리에 몰입하게 한다. 한아름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동호대교, 한남동, 한국은행 본점 등 현재 실존하는 장소를 자신만의 감각적인 색감과 질감으로 덧칠해 서울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재현함으로써 <길복순>의 세계관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연출-촬영-프로덕션 디자인이 통상적 표기 순서인 것과 달리 <길복순>은 이례적으로 연출-프로덕션 디자인 순으로 표기되었는데, 그만큼 영화의 시각적 요소를 총괄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의 비중이 컸음을 유추할 수 있다.
‘평행 서울’이라는 콘셉트로 한강을 기점으로 남쪽은 지금보다 개발되고, 북쪽은 슬럼화된 상태로 설정했다. 상가 식당은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외관의 아케이드는 피렌체 베키오 다리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내부는 수근의 두꺼비 식당만 영업하고 주변 상가는 모두 공실로 설정해 킬러 업계에서 퇴출당한 수근의 상황을 공간적으로 표현했다.
정치인 김대중과 그의 선거 참모였던 엄창록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 정치 드라마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킹과 메이커 두 인물 간의 관계와 그림자로서 살아야만 했던 메이커의 흔들리는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간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1960~70년대 한국 근현대사를 세밀하게 재현하는 동시에 감각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호평받았으며, 제43회 청룡영화상 미술상을 수상했다.
노동운동을 하던 김운범이 대통령 후보로 성장하는 과정을 인제-목포-서울로 이어지는 선거사무실의 변화에서도 읽히게끔 공간을 디자인했다. 목포 선거 사무실은 무역항이라는 목포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여 물류 창고를 개조해서 만들어진 사무실로 디자인했다. 이곳은 서창대가 김운범의 선거 운동에 합류하게 되는 시작점으로 목조의 따뜻한 감성과 연극 무대와 같은 세팅과 동선으로 디자인함으로써 뜻을 같이한 동지들의 뜨거운 에너지가 느껴지는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여기, 마치 매일 본 듯한 익숙한 공간이자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있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상상의 세계를 현실 공간처럼 창조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실제 생활 공간에서 촬영했을지라도 그곳을 영화 주인공이라는 가상 존재의 일상으로 만드는 마법적 힘을 가지고 있다. 영상은 류성희, 조화성, 한아름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스크린 위에 디자인한 공간을 분절하여 혹은 연결하여, 때로는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다각적인 시선으로 그들이 새롭게 창조한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