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어이그 저 귓것’의 하르방은 젊었을 적에 예술을 한답시고 싸돌아다녔던 인물이다. 남들은 딴따라라고 놀렸겠지만 그는 소리 예술에 몸을 맡기고 살았을 터, 늙은이가 된 그에게 주어진 건 쓸쓸함과 빈곤이다. 밭 매던 아낙들의 낮참 자리에서 노래 한 곡 불러 주고 막걸리를 대접받으면 그 날은 그나마 불콰한 낯짝을 지을 수 있는 날이다. 용필도 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가수가 되려고 서울에서 세월을 보냈으나, 그의 노래와 외모는 현란한 조명과 어울리지 않았을 게다. 그는 골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그나마 노래 실력을 갖춘 하르방과 용필에 비해, 뽕똘은 노래를 전혀 할 줄 모른다. 그러나 뽕뽈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 용필을 계속 괴롭히며 따라다닌다. 두 사람이 실패한 예술가라면, 다른 한 사람은 실패가 불을 보듯 빤한 예술가다. 오멸은 묻는다. 중요한 것이 예술인지, 아니면 성공인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예술가는 성공한 예술가이며, 우리는 그들의 예술을 보며 저것이 성공한 자의 예술이라고 칭송한다. 예술의 본질보다 산업적인 측면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시대에 영화라는 예술은 타락이 필연일 수밖에 없다.
오멸은 두 번째 작품 ‘뽕똘’에서 다시 영화라는 예술에 대해 질문한다. 이번에는 감독으로 나선 뽕똘은 음유시인의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다. 모진 자연을 이기고 살아남고자 모두 노동에 몰두하던 중세에, 악기 하나 둘러메고 세상을 떠돌며 이야기와 노래를 전하던 음유시인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답은 하나다. 그런 운명을 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음유시인이 그러하듯, 뽕똘도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다.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카메라도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는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수중에 있는 돈은 고작 3천원. ‘뽕똘’은 뽕똘이 극 중 ‘전설의 물고기’라는 정체불명의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실로 놀라운 것은 ‘전설의 물고기’라는 영화가 찍는 과정만 있지 실체가 없는 영화라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테이프를 넣지 않고 돌린 카메라에 영상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뽕똘은 영화를 찍었으나 영화를 남기지 않은 이상한 감독이며, 복제의 가능성이 없는 유일한 일회성 영화는 그렇게 탄생한다. 오멸은 괘씸하고 당돌하게도 관객을 지워버릴 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예술을 꿈꾸는 자의 행복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연극이라는 예술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데서 나온 흔적처럼 보인다. 한량을 기록한 가난한 예술가의 영화라는 점에서 나는 오멸의 영화를 뤽 뮐레와 알랭 기로디의 영화와 곧잘 비교해왔다. 오멸의 작품을 순서대로 보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도 없지 않으나, 나는 여전히 그들이 영화적 동지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한량이라는 천상의 미덕을 지닌 자들과 그들을 뒤따르는 카메라가 자연 속에서 어슬렁거릴 때, 그들 셋은 하나로 묶인다. 자연은 가난한 자들의 영화를 위한 터전이다. 뮐레의 ‘밀수범들’에서 한 남자와 두 여자가 가상의 황량한 국경지대를 두고 기이한 모험을 벌일 때, 기로디의 ‘용감한 자에게 휴식은 없다’에서 잠들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소년이 시골 마을과 꿈과 현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갈 때, ‘뽕똘’의 감독과 배우들이 전설의 물고기를 ?아 산과 바다를 정처 없이 떠돌 때, 그들의 뒤를 자연의 신이 뒤따른다. 자연의 신은 느리고 유쾌하며 자유롭다. 그리고 ‘광기의 땅’에서 또 괴상한 영화를 찍었다며 뮐레의 아내가 노 감독을 혼낼 때, 기로디의 ‘도주왕’에서 농기구 판매사원인 뚱보 남자가 실적보다 사랑을 좇을 때, ‘뽕똘’에서 뽕똘이 3000원이라는 잔고를 확인하고 쓸쓸하게 돌아갈 때, 그들의 곁엔 가난의 신이 머문다. 가난의 신은 너그럽고 착하며 순수하다. 기로디와 뮐레에게 자연이 궁극적으로 미스터리와 혼란의 배경이라면, 오멸에게 자연은 그냥 떠다는 길과 같다. 자유롭게 길을 떠나는 자는 앞에 놓인 길이 어떤 모양일지 어디로 향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멸의 영화는 무정형이다. 모험의 길을 어디로 어떻게 떠나느냐에 따라 영화의 모습이 갖추어지기에 그의 영화에서 어떤 정해진 형식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무정형의 영화를 다르게 표현하면 변증법의 형식을 지닌 영화라 하겠다. 그의 영화에서 지속적인 정은 없으며, 오멸은 영화 전체에 걸쳐 반과 부딪히는 영화를 만든다. 이것은 일회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운 스타일로 만든다는 것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오멸의 작품은 정과 반과 합을 통해 전체적으로 연결되며, 그런 점에서 오멸의 영화 한 편을 보고 섣불리 해석했다가는 다른 영화를 보고 당황하거나 혼란을 겪기 십상이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오멸이 기존의 예술, 대중문화와 다른 지점에서 자신의 작업을 펼친다는 것이다. 뮐레가 언젠가 ‘영화 속에서 한 공간의 매력을 보여주고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 영화 만들기의 으뜸가는 추동력’이라고 말했다는데, 오멸은 심지어 그런 계산도 하지 않은 채 공간의 매력을 전한다. 담벼락 곁으로 난 작은 길, 신선한 냄새가 느껴지는 맑은 공기, 문득 저 편에 자리한 푸른 하늘, 차가운 기운을 전하는 물, 스산한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는 오멸의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