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공주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아빠>를 시작으로 2006년 <아들의 것>, 2007년 <적의 사과> 등 세 편의 단편을 통해 연출가로서의 궤적을 만들어가던 이수진 감독이 첫 장편영화의 주인공으로 공주를 만나게 된 계기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30대 남자의 입장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그러고 있는데 유사한 사건이 계속 일어났고 혼자서 분노와 한탄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고 나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창동 감독의 <시>(2010)나 황동혁 감독의 <도가니>(2011), 이준익 감독의 <소원>(2013) 등 현실의 아픈 이야기들이 하나 둘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 만났다. 이수진 감독도 다시 이야기를 마음속에 품게 됐다. “한번은 나 자신에게 되물어봤어요. 이 분노가 진짜인지, 아니면 가십거리처럼 지나가는 것인지. 만약 피해자든 가해자든 내 주변에 있었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그때 나의 분노들이 표피적인 반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사건에 대해 더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거기서부터 영화가 시작된거죠.” 이수진 감독은 기존 영화가 보여준 것과는 다른 방식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자신이 처음 느꼈던 것처럼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가르고 구분해 공분을 일으키는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소녀가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과정과 그 소녀를 둘러싼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공주>에는 더불어 다양한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공주에게 새로운 거처를 제공하는 선생님과 그의 어머니,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은희와 친구들은 공주가 만나는 새로운 세상의 사람들이다. 같은 공포와 폭력을 당하고 홀로 죽음을 선택한 화옥과 사건의 발단이 된 동윤, 그리고 자식 일 앞에서 이기적으로 변하는 동윤의 아버지와 돈 앞에서 자식을 지켜주지 못하는 공주의 아버지까지, 이수진 감독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묘사하며 입체적인 시각을 유지하고자 한다. 대학에서 다큐 사진을 전공했다는 그의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엿보이는 어떤 시각과 태도다. “사실은 다큐보다는 순수사진을 더 좋아했어요. 다큐가 저에겐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어떤 거리감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거든요. 거기서 윤리적인 딜레마를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제 사진에는 늘 인물은 없고 풍경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진을 할 때는 못했던 부분들이 영화를 하면서는 가능해진 것 같아요. 배우와 협의가 되어있으니까, 대상에 다가가는 게 편하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사진이 영화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이수진 감독의 이야기들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갈등이 절정에 오르는 순간보다는 그 이후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춘다. “청개구리 심보 같은 게 있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이 부분에 주목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 비껴나가는 방법을 선택해요. 비껴나가서 그 얘기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다른 그림이 만들어지거든요. 그게 제 영화가 가지는 차별점인 것 같아요.”
더불어 ‘한공주’는 공주가 당한 폭력에 대해 과감한 묘사를 선택했다. 사실 이러한 묘사는 비슷한 소재를 다룬 기존 영화들이 일부러 피해왔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꽤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들이기에, 그 충격을 스크린에서 재현해내기란 쉬운 선택이 아니다. “저 역시 자극적인 영상으로 충격을 준다거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액션보다는 리액션을 보여주려고 했죠. 선풍기가 돌아가는 장면으로 옆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떠올리게 하는 식으로 말이죠. 사건 현장에서 동윤이 빠져나가는 장면도 덜 자극적으로 보이게 구성을 하려고 했어요. 그때 사실 저는 동윤 아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어른의 냉정함과 비열함, 우선 내 자식을 보호하고 싶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모습들이요. 그렇게 인물들의 리액션을 통해 관객이 상상하게끔 하는 것이 더 영화적인 언어라고 생각했고, 그 마음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그러나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가 어떤 메시지를 담은, 어떤 영화라는 것만큼은 명확히 하고자 했다. “공주가 집단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가장 먼저 찍었어요. 그 이유는, 나도 스태프들도 우리가 무슨 영화를 찍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이 영화를 만들 때 단 한 컷도 쉽게 찍어서는 안 된다, 그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이러이러하니까 이렇게 해석하면 돼, 라고 관객에게 말하지 않고 한 컷 한 컷 최선을 다해서 보여주고 싶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