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준
1994년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의 의상 감독으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김유선
우연히 기회가 내게 온 거다. <비상구가 없다>(김영빈, 1993)에서 미술팀에 있던 신보경 미술 감독이 영화 소품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내 친구에게 했는데, 그 친구가 사정상 하지 못하게 돼서 내가 그 일을 대신 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신보경 감독과 친해졌고 그 이듬해에 그가 <세상 밖으로>로 미술 감독 데뷔하면서 내게 의상 감독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했다. 둘 다 이 영화로 동반 ‘입봉‘한 거다.
태상준
대학에서 의상을 전공했다. 처음부터 영화 의상 쪽을 하고 싶었나?
김유선
아니다. 그 전에는 잘 몰랐던 영역이었다. 원래는 보통의 경우처럼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고 했었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좋아했으니까 자연스레 영화판으로 흘러오게 된 것 같다. 처음에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한 편 끝내면 그토록 힘들었던 현장 생각이 새록새록 하다.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몸 힘들었던 건 금방 잊게 된다.(웃음)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태상준
일반적인 의상과는 차별되는, 영화 의상만의 매력이 뭐가 있을까?
김유선
영화 안에서 의상을 통해 캐릭터들이 비로소 창조된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 영화의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들려면 그 심리나 성격, 배경 등 모든 것을 완벽히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디자인이 나온다. 영화 의상은 고도로 집중된 디테일의 영역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태상준
<좋은 친구들>(2014) <더 파이브>(2013) <더 웹툰: 예고살인>(2013) 등 최근 참여한 작품들을 보면 공포나 스릴러 장르의 영화가 많다. 개인적인 취향이 개입된 결과인가?(웃음)
김유선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의상 감독으로 참여한 작품이 모두 50편 정도 된다. ‘말랑말랑‘한 것들이 더 많은데, 상대적으로 유명세를 탄 작품들이 스릴러 장르여서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게다가 내 취향으로 영화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냥 주어지는 대로 하는 거다.(웃음)
김유선
많으면 세 네 작품 정도 한다. 프리 프로덕션 동안에 내가 전반적인 의상 콘셉트와 디자인을 진행하고, 촬영 현장은 우리 팀 안에 현장을 담당하는 팀장이 있다. 서로 역할이 분배되어 있다. 현장 자체는 과거와 비교하면 아주 효율적으로 변했지만, 나잇살 때문인지 육체적인 스트레스는 점점 더 커진다. 요즘에는 밤새는 작업은 절대 못 하겠더라고.
태상준
영화에서는 미술팀과 의상팀, 소품팀, 분장팀의 협업 관계가 중요하다. 그동안 작업하면서 갈등이나 어려움은 없었나?
김유선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크랭크 인 전 프리 프로덕션 동안에 감독, 미술팀과 함께 회의를 통해 각자 서로의 의견을 내놓고 이를 공유하면서 최적의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면 된다. 물론 각 팀의 조율과 디자인의 최종 선택은 감독의 몫이다. 만약 미술 감독이 의상을 미술의 하위 개념으로 생각한다거나, 감독이 캐릭터를 잡지 못하고 있으면 결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보통의 경우는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영화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것이니, 가끔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거나 방식이 잘 못된 경우는 있다. 이럴 때는 싸우기도 한다.
태상준
미술팀 안에 의상팀이 포함돼 있는 경우도 있지 않나?
김유선
한국에서도 몇몇 미술 감독들이 그런 시도를 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미술과 의상이 영화의 시각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미술과 의상은 범위가 다르다. 의상은 캐릭터에 밀착되어 있다. 의상이 표현하는 캐릭터의 디테일을 미술은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가 어떤 분야를 통제하기 보다는, 효율적으로 양자(兩者)가 공존하며 효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태상준
이야기를 들을수록 감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스타일의 감독이 작업하기가 편한가?
김유선
의상에 관해서 특정한 제안을 하면 이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감독이 좋다. 요구사항을 애매하게 쏟아내는 감독이나 작업 과정에서는 별 말이 없다가 완성된 의상을 놓고 특별한 이유 없이 무조건 싫다고 말하는 감독은 최악이다. 재 작업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감독의 개인 취향을 각 영역의 전문가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감독들이 간혹 있다.
태상준
김용균 감독과는 <와니와 준하>(2001)를 시작으로 <분홍신>(2005)과 <더 웹툰: 예고살인> 등 세 편을 함께 작업했다. 궁합이 잘 맞는 감독이라는 말일까?
김유선
김용균 감독 영화 중 시대물인 <불꽃처럼 나비처럼>(2008)만 내가 참여하지 않았다. 사실 <와니와 준하> 때 감독과 ‘줄기차게‘ 싸웠다. 김용균 감독이 바로 위에서 말한 특별한 이유 없이 무조건 싫다고 말한 감독이었다. 진짜 힘들었다. 아마 신인이다 보니 확신이 없었고 그래서 결정을 잘 못내렸던 것 같다. 중간에 때려 치려다 참고 끝까지 했다. 그 결과 다행히 감독도 나도 만족하는 결과가 나왔고 지금은 믿고 맡기는 사이가 됐다.
태상준
<살인의 추억>(2003)의 봉준호 감독은 어땠나?
김유선
제작진들의 역량을 200퍼센트 끌어낼 수 있는 감독이다. 각 제작진들로 하여금 그 능력을 반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감독이 있는 반면, 봉준호 감독은 내가 디자인을 더 하고 싶게 만든다. 아주 여우같은 구석이 많은 감독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