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독전> 개봉 1주년을 기념해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이 지난 5월 19일 단체 관람 행사를 열었는데.
이해영
전작들을 좋아하는 팬들이 있었지만 소수였고, 자신의 팬심을 고백하는 방식이 이메일이나 ‘DM’(SNS의 다이렉트 메시지)이었던 반면, 상영관을 대관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대한극장에 갔더니 깜짝 놀랐다.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돈을 모아 극장을 빌렸고, 1주년을 기념하는 떡을 돌렸으며, 재능 있는 사람들이 일러스트, 텀블러, 엽서, 포스터 등 영화 굿즈를 만들어 ‘전프레’(행사에 참여하는 전원에게 선물(프레젠트)을 준다는 뜻)도 했다. 관객과의 대화는 사전에 질문을 받아 질문마다 PPT를 만들어 스크린에 띄워 진행됐는데 진행이 매끄러웠고, 그래서 값진 경험이었다. 또 놀라운 건 영화 속 캐릭터의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코스프레해 참석한 관객들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박해준 씨가 연기한 선창 역을 그대로 따라 입고 온 여성 관객은 너무 인상적이었던 까닭에 박해준 씨에게 사진을 보내주었다. 행사가 끝난 뒤 대한극장 로비에서 참석한 사람 모두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독전> 블루레이를 제작하는 플레인아카이브와 함께 가서 촬영해 블루레이에 서플먼트로 담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행사가 이 정도로 열정적이고 완성도가 높을 줄 몰라서 좀 더 준비하지 않은 게 아쉽고 팬들에게 죄송했다.
김성훈
<독전>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의상 콘셉트에 대해 최세연 의상감독에게 주문한 게 뭔가.
이해영
이하준 미술감독, 최세연 의상감독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하준 미술감독으로부터 ‘어떤 느낌을 원하시나’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계를 짓지 말자’고 대답했다. 움츠러들지 말고 영화적인 시도를 더 넓게 해보자. 의상도 비슷한 맥락으로 접근했다. 이 영화에는 굉장히 영화적인 인물이 많이 등장하지 않나. 덩달아 설정적이고 영화적인 의상들이 등장하는 동시에 그와 반대로 매우 현실적인 의상도 많이 나온다. 가령, 원호의 경우 실제 형사들이 입는 의상을 그대로 입혔다. 이처럼 매우 현실적인 옷과 영화적인 옷을 한 작품에서 동시에 시도했다. 가장 중요했던 건 옷을 배우들에게 맞추는 것이었다.
김성훈
배우들의 신체 조건이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의상을 시도했다는 뜻인가.
이해영
그렇다. 진하림(김주혁)의 조직원들이 입은 옷들은 배우들에게 일일이 맞췄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편의상 양복을 입는 설정이었는데 의상감독님이 조폭이 양복 입고 나오는 건 재미없지 않냐고 반문했고, 브라이언(차승원)이 수트 차림이라 그와 차별된 느낌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의상감독님이 멕시코 힙합 스타일인 치카노 스타일을 제안해준 덕분에 한국영화로선 처음으로 그 스타일을 시도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스타일이라 신선했고 옷이며 액세서리며 잔뜩 준비해 조직원들을 연기할 배우들을 일일이 미팅하면서 적합한 이미지를 확인해 입혔다.
김성훈
레퍼런스가 없었던 까닭에 걱정은 안 됐나..
이해영
처음에는 약간 걱정됐는데 조직원 전부 입혀놓으니 새롭고 특정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나서 매우 재미있었다.
김성훈
주요 캐릭터가 입은 의상들을 하나씩 얘기해보자. 앞에서 짧게 얘기한 대로 원호는 사건을 수사할 때 실제 형사들이 입는 옷을 입는 반면, 자신을 감추어야 하는 상황에선 매우 설정적인 의상을 입는데.
이해영
원호 의상을 정하는 과정에서 그가 사건을 수사할 때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법한 진짜 형사 같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원호를 연기한 조진웅 씨의 몸이 좋아 보였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반팔이 아닌 긴 팔을 굳이 걷어입는 스타일을 결정한 것도 그래서고. 실제 형사들이 입는 아웃도어 재질의 옷은 접기 힘들다. 반대로 형사임을 감추고 누군가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입는 옷은 영화의 중요한 설정이다. 그런데 형사가 구하기 힘든 의상이면 과해 보일 것 같아서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 진하림이나 브라이언에 비해 좋지 않은 소재로 된 의상을 원호에게 입혔다.
김성훈
그럼에도 원호가 위장 의상을 입었을 때 섹시해 보이는 동시에 원작의 뢰 형사(순홍레이)에 비해 감정이 부글부글 끓던데.
이해영
그때 원호가 섹시해 보이는 건 조진웅이 멋지기 때문이다. 진웅 씨가 앞머리를 약간 잘랐는데 그 길이가 앞머리를 대충 넘겼을 때 가장 멋지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이다. 피부 톤 같은 분장 또한 그가 최대한 섹시해 보이려고 했다. 사실 원호를 바라보는 내 입장이나 감정이 원호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반영됐을 것이다. 무척 건조한 원작에 비해 그의 감정이 끓어오르는 건 어떤 면에서 그게 인간적인 면모라고 생각한다.
김성훈
조진웅이 원호를 연기하면서 시나리오와 달라진 점이 있나.
이해영
배우이기 전에 인간 조진웅이 가진 인간적이고 애교 많고 귀여운 면모가 이야기 곳곳에 들어간 것 같다. 촬영 현장에서 그에게 “생각보다 귀여운데?”라는 말을 몇 차례 했다. 하드보일드 한 형사를 연기하고 있는데 감독이 그렇게 얘기하니 그가 얼마나 황당했겠나. (웃음) 촬영 전부터 조진웅이 원호를 연기하면 아무리 위악적인 행동을 해도 관객에게 비호감으로 느껴지거나 거리를 두진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김성훈
류준열이 맡은 락의 의상은 무미건조하다. 검은색 정장과 흰색 와이셔츠 차림을 영화 내내 입고 등장한다.
이해영
진하림, 보령, 선창이나 위장 수사할 때의 원호가 색을 많이 가진 인물들인 반면 락은 무채색 계통의 의상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입은 검은색 정장이 갑옷처럼 보였으면 좋겠다 싶었고. 수트 하나를 이야기 끝까지 안 갈아입는 설정으로 정했다.
김성훈
락이 경찰서에 붙잡혔을 때 흰색 반팔 티를 입은 건 어떤 의도가 있나.
이해영
그건…글쎄 본능적인 선택인 것 같다. 검은색 수트라는 갑옷을 입기 전에 경찰에 잡혀온 상황인데 그때 모습이 특정 이미지를 규정하기 힘든 느낌이길 원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그 반팔 티가 류준열 씨가 정말 많이 입어보고 결정한 옷이다. 흰색 반팔티는 잘못 입으면 집에서 편하게 입는 ‘난닝구’처럼 보이고, 반대로 잘 입으면 너무 패셔너블해 보여서 그 중간 지점을 잘 찾는 게 중요했다. 면이 너무 얇지고 두껍지도 않고 적당히 도톰해야 하며 목이 약간 늘어나는 재질이 필요해 어렵게 고를 수 있었다.
김성훈
흰색 반팔 티를 설정한 건 류준열이라는 배우를 고려한 결정인가.
이해영
그렇다. 류준열이 가진 매력과 잘생김을 마음껏 드러내고 싶은 욕심이 컸다. 반팔티도 수트도 몸에 잘 붙는 ‘핏’으로 승부했다. 영화에서 락은 홍콩에서 일하다가 한국에 들어온 설정이지만, 어느 국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이국적인 느낌이었으면 했다.
김성훈
고 김주혁 씨와 진서연씨가 각각 연기한 진하림과 보령은 모두 화려한 의상을 입어 강렬하더라.
이해영
시나리오를 쓸 때 묘사했던 진하림의 의상은, 원호가 그들이 묶는 호텔에 갔더니 에어컨이 세게 틀어져 있었고, 하림은 달랑 팬티 차림에 ‘퍼’(fur, 모피)를 걸쳐 입었다. 왠지 모르게 이상한 사람이라고도 썼다. (김)주혁 선배가 입으니 멋지긴 한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복싱 선수들이 입는 박스형 팬티를 포함해 여러 스타일의 의상들을 입히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악역이라 너무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도 컸는데 다행스럽게도 주혁 선배가 잘 소화해주셨다.
김성훈
진하림과 보령, 두 사람이 입은 의상은 각각 다르지만, 함께 맞춘 느낌이 들었다.
이해영
호텔이 집인 사람들이지 않나. 손님이 왔다고 해서 격식 차리진 않을 것 같았다. 입던 대로 있는 거지. 하림은 속옷만 걸쳤을 것 같았다. 상의는 가운을 걸쳤는데 가운 하나로 하림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질감이길 원했다. 색감은 붉은 피부 톤에 맞췄다.
김성훈
피부 톤을 붉은 계통으로 설정한 이유가 뭔가.
이해영
예민한 사람이라 만성 피부 질환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붉은 얼굴에 습진이나 발진이 여기저기 있는 얼굴이면 좋을 것 같았다. 헝클어진 헤어스타일, 붉은색 얼굴, 팬티, 가운까지 세트로 맞춰진 느낌이 들었다.
김성훈
김주혁 씨가 그런 설정을 부담스러워하진 않던가.
이해영
가장 큰 걱정은 피부 톤이었다. 어떤 배우가 부자연스러운 붉은 톤의 피부를 좋아하겠나. 잘생김을 가리니까 배우들이 싫어할 수 있는데 주혁 선배님은 재미있어하셨다. 헤어스타일도 처음에는 여러 모양의 가발을 씌웠는데 결국은 선배님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지금의 영화 속 스타일로 연출했다.
김성훈
그게 보령의 의상과도 잘 어울려야 했겠다.
이해영
그렇다. 촬영하기 전 진서연 씨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의상을 매우 많이 입어야 했다. 하림과 커플룩이 아니지만 커플룩처럼 보이되 과하지 않게 연출하는 게 중요했다.
김성훈
한국영상자료원에 의상을 기증한 소감이 어떤가.
이해영
영화를 제작한 용필름이 선뜻 기증해준 덕분에 앞으로 더 많은 제작사들이 기증할 수 있을 것 같아 고무적이다. 국민 정서가 선진화될수록 아카이빙이 얼마나 중요한지 공감할 수 있다. 그동안 소품이나 의상 같은 영화의 작은 부분들은 실제로 얼마나 소중한가. 그러한 것들이 영구 보존된다니 감독으로서 감사하고 기쁘다. 다음 영화도 당연히 기증하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