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이제 상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좋은 쪽으로 생각을 했다. 수상하게 되어 기쁘다.
김성훈
많은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지 않았나. 해외에선 이 영화를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궁금하다.
김보라
우리나라 관객들과 비슷한 맥락에서 보는 것 같다. <기생충>도 한국적이라고들 많이 하지만 해외에서 인정받지 않았나. 영화는 보편적인 언어같다. 예술 작품은 결국 보편적 언어로 닿는 것 같다. 꼭 어떤 지역에 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인 것 같다. 또 해외에서 ‘영화를 참 잘 만들었다’, ‘첫 영화같지 않다’, ‘스토리텔링이 성숙하다’, ‘내가 은희가 되어서 영화를 봤다’, ‘약간 홀린 듯이 봤다’ 같은 반응들이 주로 많았다. 앨리슨 벡델 이라는 만화작가와 인터뷰를 한 적 있다. ‘스펠바운드(spellbound, 마음을 다 빼앗긴)’라는 표현을 해주어서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김성훈
알려진 대로 <벌새>는 당신의 전작인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벌새>를 준비하기 전에, <리코더 시험>의 주인공 막내 은희 이야기를 확장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
김보라
<리코더 시험>을 본 관객분들이 은희가 어떻게 성장할지 궁금하다고 정말 많이 이야기해주셨다. 그냥 지나가는 질문이나 예의상 묻는게 아니고, 쪽지도 받고 많은 질문을 진지하게 받았다. 그래서 ‘진짜 이 아이를 성장시켜 볼까?’ 라는 마음이 생겨 2011년부터 구상을 해 2013년에 초고를 썼다. 그리고 <리코더 시험> 시나리오를 읽은 주변분들이 장편 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해준 영향도 있다.
김성훈
<벌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을 레퍼런스로 삼은 이유가 뭔가. 주인공의 연령을 고려했을 때 에드워드 양의 치정극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1991)을 먼저 떠올릴 법도 한데.
김보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경우, 주인공이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를 죽인다? 그 점에서 동의가 쉽게 되지 않았다. 윤리적으로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를 따지는 건, 영화가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 영화는 굉장히 남성의 서사인 것 같다. 실제로도 많이 일어나는 치정극이니까. 영화 자체는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많은 현실과 흡사해 훨씬 더 공포영화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 그리고 둘>은 에드워드 양이 좀 더 성숙해져서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세계가 그저 좋았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비해 러닝타임이 짧아서 되게 자주 본 영화이기도 하다.
스크린에 담긴 햇빛 하나까지 버릴 게 없을 만큼 완벽한 그림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벌새>에서 은희와 지환이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을 찍을 때 실제 극장을 대관했다. 현장 프로듀서가 내가 <하나 그리고 둘>을 좋아하는 사실을 알고 그 극장에서 틀어주었는데, 촬영을 하는 도중에 <하나 그리고 둘>에 빠진 거다. 진행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가운데 영화에 감동받으니 스크립터가 ‘감독님, 영화에 완전 빠져들었죠?’라고 말하더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웃음)
김성훈
은희가 자신의 집을 잘못 찾아가는 <벌새>의 오프닝 시퀀스는 은희라는 소녀가 가진 불안감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점에서 꽤 의미심장하다.
김보라
첫 문장의 중요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프닝 시퀀스를 정하는 과정에서 꽤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학교에서 시작하자, 성수대교 사건을 먼저 보여주자 같은 의견들이 있었는데 모두 오프닝 시퀀스로 적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김성훈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또 어떤 오프닝 시퀀스가 있었나.
김보라
아주 초창기에는 은희가 벌을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지각한 벌로 넓은 운동장에서 토끼 뜀을 하는 장면이었다.
김보라
어떤 징벌의 의미에서 시작을 하는 거죠. <리코더 시험>도 징벌에서 시작한다. 은희가 리코더를 안 가지고 와서 손을 들고 있는 장면으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귀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질적인 어떤 불안감을 내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람들 앞에서 징벌을 받는 건, 그 아이에게는 되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행위니까. 대학 시절 수학 과외 선생님이자 친오빠의 친구에게 오프닝 시퀀스에 대한 얘기를 해드린 적 있다. 그랬더니 그가 자신이 군 입대 시절 휴가 나온 이야기를 해주는 거다. 휴가를 나와 집을 찾아가 벨을 눌렀는데 집 안에서 강아지 소리가 들리니 ‘어, 우리 집은 강아지를 안 키우는데’라며 ‘가족들이 나를 버리고 떠났구나’라고 생각을 했다더라. 보통은 손님이 강아지를 데리고 집에 놀러왔거나 어머니가 반려동물을 입양하기로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나. 그때 그 오빠는 그 상황이 되게 절망적이었다는 거다. 그런데 자신의 어머니가 강아지를 안은 채 문을 열어주었다고 하더라. 이 얘기를 듣고 이런 설정으로 시작하자고 생각했다.
김성훈
오프닝 시퀀스로 달리는 장면을 선택하지 않은 건 청춘영화나 성정담의 클리세라고 판단했기 때문인가.
김보라
그렇다. 학원물로 시작하는 느낌이 드니까. 후반작업하는 과정에서 현재 영화 속 오프닝 시퀀스를 빼자는 의견도 있었다. 모니터링을 하는 과정에서 줌아웃되는 카메라의 움직임 때문에 공포영화냐는 지적도 있었다. (웃음) 강국현 촬영감독님 또한 자신이 찍어 놓고 ‘이거 진짜 잘 찍긴 했는데, 너무 힘준 거 같으니까 빼셔도 된다”고 뒷걸음질 치려고 하는 것 같더라. (웃음) 원래 현장에서 그 줌아웃 숏을 찍을 계획이 없었는데 강 촬영감독님의 주문에 따라 찍었는데, 나중에 후반작업에서 보니 정말 좋더라.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줌아웃 숏을 좋아해줘서 촬영감독님께 되게 고마웠다.
김성훈
이 오프닝 시퀀스가 중요한 건 영화의 주요 배경인 아파트가 어떤 구조인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김보라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복도형 아파트를 염두에 두었다. 아파트를 찾는 전담 스탭이 한 명 있었다. 대학교 강의하던 시절 제자가 있었는데 그가 방학 때 영혼을 다 바쳐 아파트만 구하러 서울을 헤집고 다녔다. 얼마나 돌아다녔으면 한 달이 지난 뒤 보니 그의 팔이 새카맣게 타 있었다. 미안한 동시에 감동적이었다. 서울 시내에 있는 재개발 아파트를 모두 뒤진 덕분에 이야기의 실제 배경인 대치동 은마아파트, 미도아파트를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김성훈
박지후와 김새벽의 어떤 점에서 은희와 영지 선생님에 각각 적합하다고 판단했나.
김보라
김새벽 배우와의 첫 만남에서 대본 리딩을 했다. 박지후 배우와 함께 하는, 가볍게 시작한 리딩인데 나와 스크립터가 감동해 울었다. 리딩만으로도 폭풍 감동을 받다니. 김새벽, 박지후 두 배우가 대사를 하는데 ’내가 쓴 대사에서 살아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사무실에 온기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신기한 경험이라 집에 와서 페이스북에 이 아름다운 예술의 감동에 대해 글을 올리기까지 했다.
김성훈
김새벽씨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내내 동선과 행동 그리고 대사의 톤 때문인지 유령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보라
그런 의견을 많이 들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영지는 이세상 사람이 아닌, 비현실적인 인물 같다는 의견도 많이 들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느낌을 갖고 자살할 줄 알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감상들이 영화에 녹아들 수 있는 것은 배우의 몫이다. (김)새벽씨는 시나리오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문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배우다.
촬영 당시 새벽 씨가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당시에 참 안타까웠지만 영화에서는 아이러니하게 더욱 역할에 잘 맞아졌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원래 상태로 돌아와 줘서 다행이다.
김성훈
정인기씨는 성미산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공부하지 말고 신나게 놀아라’는 내용의 자작곡을 들려주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런 그에게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은희의 아버지 역할을 맡기게 된 이유가 뭔가.
김보라
(웃음) 실제로 가부장적인 사람이 가부장 연기를 하면 별로다. 그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가부장적인 역할을 하면 뭔가 더 싫어 보이는 느낌이 있다. <리코더 시험>때와 똑같은 배우와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아빠역할 만큼은 정인기씨 말고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김보라
말로만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웃음) 여러 제안이 들어오고는 있다. 마음을 다하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김성훈
한국영상자료원 수집캠페인을 통해 귀중한 의상들을 기증해주셨다. 소감이 궁금하다.
김보라
<벌새>의 자료들이 영구보존 된다니 감사할 뿐이다. 수집캠페인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이런 아카이빙 활동이 더 활발해진다면 많은 창작자들이 촬영 전에 미리 아카이빙 계획을 세울 것 같다. 제작사와 제작자가 체계적인 아카이빙을 준비하면 좋겠다. 다음 영화도 자료원에 기증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