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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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된 영화유산

자산어보

  • 감독 이준익
  • 각본 김세겸
  • 각색 김세겸, 김정훈
  • 프로듀서 김성철 (NGENE FILM)
  • 촬영 이의태
  • 조명 유혁준
  • 편집 김정훈
  • 음악 방준석
  • 미술 이재성
  • 세트 김남호 (나모아트)
  • 소품 유청 (드림아트센터)
  • 의상 심현섭
  • 출연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민도희
  • 제작사 ㈜씨네월드
“이 양반은 대역 죄인이니 너무 잘해줄 생각들 말어”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세상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
호기심 많은 '정약전'은 그 곳에서 바다 생물에 매료되어 책을 쓰기로 한다.
이에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청년 어부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창대’는 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창대’가 혼자 글 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거래라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차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너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지?"
그러던 중 '창대'가 출세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약전'은 크게 실망한다.

‘창대’ 역시 '정약전'과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정약전'의 곁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결심하는데... (출처 : KOBIS)

이준익 감독, 심현섭 의상실장 기증 <자산어보> 의상/소품
정약전(설경구) 한복 의상 세트 : 약전은 사대부이기 때문에 평민들과는 달리 색깔을 밝게 갔다. 광목 재질을 사용하여 평민인 가거댁이나 창대의 의상인 삼베하고는 차별점을 두었다. 만져보면 알겠지만 삼베는 거칠어서 피부에 불편함을 주는데 광목은 그런 게 없다. 단정하게 꼬맨 부분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약전의 귀향 생활이 궁핍하긴 하지만 양반이니만큼 아무 실이나 막 쓴 것이 아니라 색깔을 맞춘 것을 볼 수 있다. (이준익 감독) 정약전(설경구) 한복 의상 세트 : 약전은 사대부이기 때문에 평민들과는 달리 색깔을 밝게 갔다. 광목 재질을 사용하여 평민인 가거댁이나 창대의 의상인 삼베하고는 차별점을 두었다. 만져보면 알겠지만 삼베는 거칠어서 피부에 불편함을 주는데 광목은 그런 게 없다. 단정하게 꼬맨 부분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약전의 귀향 생활이 궁핍하긴 하지만 양반이니만큼 아무 실이나 막 쓴 것이 아니라 색깔을 맞춘 것을 볼 수 있다. (이준익 감독)
<자산어보> 스틸 이미지 (출처: 씨네월드) <자산어보> 스틸 이미지 (출처: 씨네월드)
창대(변요한) 한복 의상 세트 : 창대 의상의 경우 바다 사나이의 면모를 텍스쳐에 드러내기 위해 삼베를 썼다. 목 부분에 찌든 땀자국과 몇 번이고 꿰어 붙인 자국에는 빈민의 자식이자 어부인 창대의 고단함을 담았다. 의상을 잘보면 사포로 문지르고 구멍을 내었는데 헤지고 꼬맨 부분을 포함한 의상의 모든 부분이 창대가 가난하지만 강직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준익 감독) 창대(변요한) 한복 의상 세트 : 창대 의상의 경우 바다 사나이의 면모를 텍스쳐에 드러내기 위해 삼베를 썼다. 목 부분에 찌든 땀자국과 몇 번이고 꿰어 붙인 자국에는 빈민의 자식이자 어부인 창대의 고단함을 담았다. 의상을 잘보면 사포로 문지르고 구멍을 내었는데 헤지고 꼬맨 부분을 포함한 의상의 모든 부분이 창대가 가난하지만 강직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준익 감독)
<자산어보> 스틸 이미지 (출처: 씨네월드) <자산어보> 스틸 이미지 (출처: 씨네월드)
가거댁(이정은) 한복 의상 세트 : 가거댁의 의상에는 남루하고 가난한 와중에도 최대한 검소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으려는 가거댁의 성격을 담았다. 비록 낡기는 했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단정함을 옷매무새에서 엿볼 수 있다. (이준익 감독) 가거댁(이정은) 한복 의상 세트 : 가거댁의 의상에는 남루하고 가난한 와중에도 최대한 검소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으려는 가거댁의 성격을 담았다. 비록 낡기는 했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단정함을 옷매무새에서 엿볼 수 있다. (이준익 감독)
<자산어보> 스틸 이미지 (출처: 씨네월드) <자산어보> 스틸 이미지 (출처: 씨네월드)
이준익 감독 친필 사인 대본 이준익 감독 친필 사인 대본

이준익 감독 인터뷰
관객의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콘텐츠들 사이에서 <자산어보>는 흑과 백 두 가지 색만으로도 풍부한 정서를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안개에 싸인 산과 바다의 다채로운 질감은 찬찬히 먹을 갈아 수묵화를 그린 듯 하며 인물들이 주고받는 눈빛은 자산어보 속 물고기들의 펄떡이는 아가미처럼 살아 숨쉬는 호흡으로 다가온다.
약전의 시대로부터 이백여년이 지난 2021년, 자산어보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은 의상과 소품 그리고 영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준익 감독을 만났다.
황민진
다른 역사적 인물이 아닌 정약전과 창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계기는 무엇인가.
이준익
역사의 어느 한 부분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 때 그저 기록에만 머문다면 학술적 자료 혹은 다큐멘터리와 같은 지식 정보에 머물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다보면 발견되는 역사적 사건과 사건 사이의 콘텍스트가 오히려 기록보다 더 사실적이고,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200년 전 창대라는 인물이 처한 컨텍스트에서 약전을 맞이했을 때 입장과 태도는 어땠을지, 각 인물의 내면의 편차를 어떻게 충돌시키면 둘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는지를 추론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황민진
흑백으로 진행되다가 컬러로 바뀌는 각 장면에 대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이미 다양한 해석을 해주었지만,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먼저 창대가 약전에게 “벗을 깊이 알면 내가 깊어진다.”라는 말을 들은 후 처음으로 컬러가 짧게 등장한다.
이준익
닫혀있던 우물 안 개구리였던 창대가 우물 밖에서 들어온 두꺼비인 약전을 만나고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 장면이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자각하는 순간을 보여주기 위해 잠깐 컬러를 사용했다.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글이나 대사로 설명하는 표현 방식은 고차원적이지 않으니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두 번째 장면은 성게껍질에서 파랑새가 나오는 장면이다. 실제 자산어보 원문에서 창대가 “그 파랑새를 밤송이새라고 합니다.”라고 표현한다. 흑백 영화다 보니까 파랑새를 대사로만 전달하기에는 시각적 아쉬움이 있어서 파란색을 살짝 넣은 것이다. 물론 파랑새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컨텍스트를 통해 이를 창대의 순수함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나는 오로지 자산어보 원문 속 표현에 따라 단순하게 색을 넣은 것이다. 이렇게 연출 의도는 단순할지라도 보는 의미는 풍부해질 수 있다. 다양한 의미로 창대의 내면을 읽어주시는 관객분들께는 엎드려 절을 하고 싶을 정도로 감사하다.

세 번째로, 마지막 장면에 “흑(黑)산이 아니고 자(玆)산”이라고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관통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원래 검기 때문에 검은 것이 있는가 하면, 여러가지 색이 버무려져서 결과적으로 검게 되는 두 가지의 개념이 ‘검다’는 표현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단순히 검을 자(玆)와 검을 흑(黑)이라는 글자의 차이보다 관점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막연히 검은 것은 불길하고 어두운 암흑과 같지만, 모든 것이 아우러져 검은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풍요롭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암울하고 어둡게만 볼 것인지 아니면 검은 것을 보고도 다양하고 풍요롭게 볼 것인지는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컬러로 전환했다.

사실 감독이라는 내 직업에 성실하기 위해 열심히 설명하긴 했지만 (웃음) 개인 이준익은 이런 식으로 멋있게 말하려고 하고,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황민진
지금 이 시대의 관객들뿐 아니라,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한정된 정보만을 가지고 <자산어보>를 보게 될 관객들에게는 감독님의 이런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더욱 소중하게 전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고 이렇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준익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감사하다. 이런 이유에서 아카이빙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황민진
흑백 촬영에 대해서도 많은 찬사를 받았는데, <동주>에 이어 다시 흑백촬영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이준익
전작인 <동주>와 같이 <자산어보> 또한 비상업적인 소재다 보니 적은 제작비로 영화를 완성해야했다. 최소 100억은 들여야할 사극 스케일인데 40억으로 한도를 정해놓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제일 먼저 내 개런티를 반 이하로 확 깎았고 설경구, 변요한 배우도 다른 영화에서 받는 것의 반 이하로 깎았다. 당연한 것이지만 스탭이나 조, 단역 배우들에게는 온당한 개런티를 모두 지불했다. 장비도 더 좋은 것을 쓰고 싶었지만 제작비를 생각해서 이제 한물가서 안 쓰는 장비를 싸게 빌려오자, 해서 레드라는 카메라를 썼다. 결과물이 잘 나왔다고 한다면 현장에서 조명, 앵글, 후반작업, CG를 통해 스텝들이 적극적으로 몸으로 떼워서 달성한 것이지 돈으로 메꾼 영화가 아니다.
황민진
흑백영화이기 때문에 촬영에 있어서 특별히 신경 쓴 장면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이준익
약전이 술을 먹고 바닷가에서 약용과 같은 달은 쳐다보면서 시를 주고받는 장면을 보면 어마어마한 기암절벽과 주상절리의 풍부함을 볼 수 있다. 밤 장면임에도 정말 밤에 찍으면 광원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보이기 때문에 낮에 찍었다. 흑백의 장점 중에 하나가 데이 포 나이트 기법을 컬러보다 효과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드론으로 저 멀리서 익스트림 롱샷으로 파도와 달빛을 담은 컷과 함께 파도소리와 멋진 시에서 오는 감흥은 어떤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들이다. 이런 장면들은 촬영감독의 상상과 노력의 결과로 담아낸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 뿐 아니라 약전이 마을 사람들과 씨름을 하는 장면도 보면 피사체인 약전과 파도와 파란 하늘 배경이 하나의 수묵화처럼 어우러진다. 이런 장면들은 자연이 주는 선물이자 촬영감독의 세련된 감각과 배우들의 움직임의 결과다. 다른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미덕이자 특별함이다. 조작된 어떤 연출이 아니고, 의도가 들키는 과도한 장면이 아니고 그냥 자연과 인간이 한 화면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그 장면은 다시 돌려봐도 식지 않는다.
황민진
각본에는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삭제하거나, 촬영했음에도 편집한 장면 중 가장 아까운 장면은 무엇인가.
이준익
<자산어보>의 파이널컷 러닝타임이 두 시간이 넘는다. 편집할 때 투자사에서 영화를 두 시간내로 줄여달라고 해서 최대한 노력했음에도 못 줄여서 결국 두 시간을 넘었다. (웃음)
원래 편집 전에는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 대한민국 최초로 세례를 받는 장면을 촬영했었다. 그라몽 신부를 달시 파켓이 연기했고, 대한민국 최초로 세례를 받은 신도를 담은 장면이라 많이 아쉬웠다.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정약종 사형 당시와 로마 교황청에서 제사를 금하라는 명이 왔을 때도 이승훈이 옆에 있게끔 촬영하였는데 세례 장면이 날아가는 바람에 맥락이 생략되었다는 점이 좀 아쉽다.
이 장면 말고도 편집과정에서 뺀 아쉬운 장면으로는 정약용의 해배를 결정한 왕명에 따라 의금부가 통보해줘야 하는데 2년 동안 통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를 보여주고자 조정에서 왕과 충신들의 대화장면을 찍었는데 편집 과정에서 뺐다. 이미 관객들은 저 한양의 조정에서 있는 일은 까먹고 섬 안에서의 아기자기한 재미에 푹 빠져있는데 갑자기 외부의 정치적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은 관객들에게 유쾌하지 않은 씬이니까 상업적인 목적으로 빼자라는 의견이 많아서 뺐다.

근데 어차피 영화가 안될 줄 알았으면 그냥 넣을 걸이라는 생각도 든다. (웃음) 지금 말한 것 말고도 뺀 것이 많다. 창대가 바다 나가서 약전과 도미 잡고 우럭 잡고 해파리 이야기 할 때 그 다음 씬에서 뭔가 창대의 구구절절한 어부로써의 삶의 지혜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씬도 있었다. 바다 속에서는 정어리 무리들은 수 천 마리, 수만마리가 몰려 다녀도 서로가 부딪히지 않고 아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에 비해서 인간들은 그 안에서 사람이 서로 부대끼고 서로를 해치면서 사는 것은 바다 속의 질서있는 그런 정어리 떼들의 움직임보다 못한 것 아니냐며 은유하는 씬들이 있었다. 아주 의미 있는 씬이었는데 길어서 뺐다.
황민진
이렇게 아쉽게 편집된 장면을 모아서 감독판으로 다시 영화를 공개할 계획은 없나.
이준익
감독판은 안될 것이다. 일단 편집도 다시 하고 음악도 다시하려면 돈이 많이 드는 데 아쉽게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황민진
음악에 있어서 전통악기만을 쓴게 아니라 비올라 첼로 신디사이저를 쓰면서도 수묵화 같은 화면에 잘 어울리는게 인상깊었다.
이준익
맞다. 같은 사극인 <사도>에서는 징 소리와 같이 국악적인 면을 강조하곤 했는데 <자산어보>에서는 일부러 국악기가 두드러지게 의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이야기와 장면 자체가 조선 후기 전통 생활상을 보여주는데 여기에 국악기까지 강조하면 의도가 과하게 도드라지기 때문에 서양악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방준석 음악감독에게 요구했다.
음악이 영화가 지닌 톤 앤 매너에 스며드는 컨셉으로 영화감상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서양음악인지 동양음악인지 신경 쓰기보다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 안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크게 음악적으로 과욕을 부리지 않고 적절히 선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예를 들어 창대가 “마을에 슬픈 일이 생기면 소라가 운다는 걸 아십니까?”하면서 파도소리와 함께 현악기의 소리가 다가올 때, 귀를 통해 가슴으로 음악이 스며든다.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언제 장면이 건너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하게 되는 식의 음악으로 끌고 가고자 했다.
황민진
가거댁과 창대의 집을 보면서 좁은 공간임에도 굉장히 입체적이라고 느껴졌다. 프로덕션 디자인에 있어서 미술감독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다.
이준익
가거댁네 집이 위치한 지형은 사실 집이 있을 위치가 아니다. 바닷가 절벽에 집이 있으면 나중에 태풍오고 바람불면 집이 다 날아간다. 가거댁 집에 대해서 내가 그린 그림은 무조건 대청마루는 바다 옆에 있어야 하고 마치 사진 프레임처럼 뻥 뚫려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가옥구조 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 구조다. 바다가 배경으로 보이는 마루에 인물이 들어갔을 때 프레임 속에 프레임 안에서 보여지는 인물의 구체성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단순히 말하면 어쨌든 멋있어서였다. (웃음)
창대의 집은 나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남양주에 있는 임권택 감독님이 <취화선>을 찍을 때 만들어 놓은 세트장의 일부다. 건설사에 세트장이 팔린 상황은 개인적으로 너무나 안타깝지만, 이미 반 폐허가 된 누추한 상태의 세트가 영화적으로는 오히려 창대의 삶에 더 잘어울려서 마음에 들었다.
황민진
흑백영화에서 의상연출은 또다른 고민거리가 많았을 듯 하다. 각 캐릭터의 의상을 정함에 있어서 의상실장님과 어떤 부분을 논의하였을지 궁금하다.
이준익
<자산어보>에서 영화적으로 의상 컨셉을 잡고 제작하여 배우에게 입히고 운영했던 사람이 심현섭 의상실장이다. 심현섭 의상실장이 가지고 있는 의상에 대한 영화적 경험치는 우리나라 최고다.
<자산어보>를 같이 하기로 결정하고 심현섭 의상실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핸드폰을 제일 비싼 걸로 바꾼 것이었다. 그 전에 사극을 흑백으로 작업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극 의상들을 흑백으로 찍어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신분의 차이를 드러내는 양식으로 컬러뿐만 아니라 비단, 삼베, 모시 등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질감까지도 설계를 하고. 그리고 염색의 농도도 어디까지 해야 흑백에서 콘트라스트가 적절한지를 연구한 것이다.
이걸 모두 흑백으로 찍어서 각 캐릭터에 맞게 편차를 두어야 하는데, 컬러 영화의 경우는 색깔만 바꾸면 될 것을 흑백으로 찍게 되면 빨간색이 검게 나오고 파란색은 뿌옇게 나오는 등 의도와는 다르게 화면에 담길 수 있기 때문에 인물 연출 의도에 맞춰서 빨강을 브라운으로 바꾸는 등 컬러와 흑백의 수치적 편차까지 다 계산해서 제작한 것이다.
나야 뭐 의상실장이 가져온 것 보고 “어유, 좋네”아니면 “요건 좀 바꾸면 좋겠네” 이렇게 결정할 수 잇는 호사를 누리지만.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거 하나를 만들기위해서 수 많은 데이터들의 수치를 놓고 도출해 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내가 상을 받을게 아니고 이렇게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촬영감독이나 의상실장이나 미술감독같은 사람들이 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민진
말씀을 들으니 의상 위주로 영화를 다시 한번 보고싶어진다. 기증해주신 창대의 실물 의상을 보면 유독 헤진 부분과 무언가 묻은 자국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준익
창대 의상의 경우 일단 바다 사나이의 면모를 텍스쳐에 드러내기 위해 삼베를 썼다. 목 부분에 찌든 땀자국과 몇 번이고 꿰어 붙인 자국에는 빈민의 자식이자 어부인 창대의 고단함을 담았다. 의상을 잘보면 사포로 문지르고 구멍을 내었는데 헤지고 꼬맨 부분을 포함한 의상의 모든 부분이 창대가 가난하지만 강직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의상 하나하나에 캐릭터의 성격을 모두 반영해야 하니까 의상만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 영화의 드라마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의상감독들은 단순히 옷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옷을 통해서 사람을 보여주는 직업이다. 카메라에 비치는 것까지 모두 계산해서 세월의 형태가 묻어나는 것이다.
황민진
가거댁 의상도 마찬가지로 실존하는 인물의 의상을 보는 듯한 디테일이 인상깊다.
이준익
가거댁의 의상에는 남루하고 가난한 와중에도 최대한 검소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으려는 가거댁의 성격을 담았다. 비록 낡기는 했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단정함을 옷매무새에서 엿볼 수 있다. 옷을 자세히 보면 헤지고 닳은 부분이 있는데 닳은 부분 중에서도 더 닳지 말라고 깔끔하게 덧대고 꿰맨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자국 하나, 바느질 한 땀에도 다 이유가 있다. 실제로 우리가 옷을 꼬매 입거나 자국이 묻어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가거댁 의상을 잘 보면 실도 어느 부분은 굵은 실, 어느 부분은 가느다란 실을 썼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목 부분은 목에 자주 닿으니까 가는 실로 해서 까칠까칠하지 않게 만든 것과 같이 캐릭터가 주로 하는 동작까지 고려해서 닳는 부분까지 계산하여 옷을 만드는 것이다.
황민진
의상실장님과 정말 많은 말씀을 나누셨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준익
아니다. 우린 말 많이 안하고 각자 알아서 한다. (웃음) 약전의 의상은 사대부이기 때문에 평민들과는 달리 색깔을 밝게 갔다. 광목 재질을 사용하여 평민인 가거댁이나 창대의 의상인 삼베하고는 차별점을 두었다. 만져보면 알겠지만 삼베는 거칠어서 피부에 불편함을 주는데 광목은 그런 게 없다. 단정하게 꼬맨 부분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약전의 귀향 생활이 궁핍하긴 하지만 양반이니만큼 아무 실이나 막 쓴 것이 아니라 색깔을 맞춘 것을 볼 수 있다. 평민은 입을 수 없는 사대부 집안의 두루마기를 고증을 거쳐서 주름 하나하나 연출했다. 신분의 차이가 드러낼 수 있도록 영화에 보이지 않는 내피의 풍부함과 띠 하나까지 고려해서 실루엣을 만들었다.
황민진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 많은 좋은 시 구절들이 많이 나오는데 감독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싯구나 대사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준익
우리 모두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닌 이상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말이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그런 비타민 같은 문구가 아닌가 싶다. 요즘 시대는 자기 PR이 워낙 중요하다 보니 “내가 남을 알아주기보다는 네가 나를 알아봐줘야지!”하며 남을 알아보는 것에 소홀해지는 듯 하다. 모두가 내 목소리를 들으라고 소리치기만 하는 세상은 지옥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일수록 남을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하며 매일 아침에 눈을 뜬다면 결국 그 사람이 결국은 최종 위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편집 황민진(한국영상자료원 수집카탈로깅팀) ㆍ 사진 김성백(스튜디오 “오늘의 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