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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찍기 전 원칙, 첫째는 리얼리즘, 둘째는 모더니즘, 셋째가 격조” | 2024.09.24 | 649 |
“영화를 찍기 전 원칙,
첫째는 리얼리즘, 둘째는 모더니즘, 셋째가 격조” ‘수집가’ 정일성 촬영감독의 기증품 코멘터리 글: 남선우(씨네21) 사진: 오계옥(씨네21) * 정일성 촬영감독 정일성 촬영감독은 양손을 비운 채 걸어왔다. 약속 장소였던 서울 성북동의 2층 카페가 그의 자택에서 멀지 않았으니 그랬을 테지만, 그 순일한 자태에서 어떤 의지가 연상됐다. 상패와 노트, 시나리오 책자들을 비롯한 자료 수십 점을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한 노장의 마음이 그 빈손에 겹쳐 보였달까. 기증품에 대해 묻기 위해 이것저것 짐을 이고 온 쪽은 우리였다. 1957년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 촬영감독으로 데뷔해 2006년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을 완성하기까지 한국영화 95편의 카메라를 잡았던 정일성의 궤적을 오래도록 연구·보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다. 여정에 동행하고 싶은 관객이라면 10월 25일부터 11월 6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기획전 <수집가의 영화: 정일성>에 찾아주시길 바란다. <화녀>(1970), <문(門)>(1977), <이어도>(1977) 등 그의 대표작 17편 상영에 더해 선별된 주요 기증자료 전시와 3회의 관객과의 대화, 2회의 강연이 마련되었다. 그 시간을 앞두고 만난 정일성 촬영감독은 자신에게 각별한 기억 몇 점을 먼저 꺼내 보였다.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작품이 나를 망가뜨리기도, 후회하게도 했지만 다시 기대를 품고 새 영화를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라며 지난 세월을 반추한 그는 기증을 결심한 까닭부터 들려줬다. “우리 가족 중에 영화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기증을 못했을지도 몰라요. 귀중한 자료라면 후배들과 영화 학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영상자료원을 기증처로 택했어요. 영화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내서 문헌을 보고, 고전을 보러 오는 곳은 여기밖에 없으니까요. 몇십 년간 수집해온 영화 서적들과 자료에 제가 걸어온 인생과 영화를 사랑해온 마음이 담겨 있어요. 역사적으로 굴곡이 많았던 시대잖아요. 모두 가난했기에 책 한 권이 소중했어요. 이사를 하면서도 다른 건 다 버리더라도 수집한 책은 못 버리겠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남긴 기록으로부터 나를 다시 발견할 수 있어요. 그때의 잘못된 생각을 고칠 수 있고요. 우리에겐 기록을 폐기해야만 했던 슬픈 역사도 많이 있는데, 먼 미래를 위해 기록을 보관하려는 정신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지하실의 7인>(1969)이 남긴 트로피* <지하실의 7인> 트로피 “<지하실의 7인>이라는 작품으로 현 백상예술대상의 전신인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 영화부문 기술상을 받았습니다. 수상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별로 없어요. 처음 상을 받았을 때는 아마 기뻤겠죠? 그런데 상을 받는 행위로부터 압박도 받아요. 앞으로 상 값을 해야 되거든. 나를 상 받게 한 영화보다 더 좋은 화면을 디자인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죠. 이 상을 받기까지 <지하실의 7인>을 작업한 시기가 60년대죠? 한국의 제작 여건이 굉장히 열악하던 때입니다. 그 원인이 정부에도 있었어요. 정부가 영화 필름을 사치품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필름에 대한 세율이 엄청나게 높았어요. 영화 제작자들, 종사자들이 피해를 많이 봤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영화가 지속돼야 한다는 열망이 한국영화의 맥을 지금까지 이은 원동력이 아닐까 싶어요.” 김기영과 함께한 <화녀>(1970) 그리고 <이어도>(1977)“김기영 감독과 일하던 시절, 저는 우이동에 살았습니다. 김기영 감독의 사무실 겸 개인 주택은 필동에 있었고요. 김기영 감독이 콘티를 짜오라고 하면 밤이 새도록 연구해서 새벽 네 시에 첫 버스를 타고 그를 만나러 갔어요. 그 특출난 사람한테 뒤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웃음) 내가 짠 콘티가 얼마나 반영될 수 있을지 감독과 기 싸움을 해야 했죠. 조그만 방에서 내가 생각한 촬영 시간대, 장소, 각도를 설명하며 ‘연출자는 인문학적으로, 나는 과학적으로 접근할 텐데, 그 융합은 오로지 김 감독의 몫’이라 하니 그도 당황하더라고요. 자신이 작품에 대해 한 말을 내가 기술적으로 구체화해오니 몹시 놀란 거죠.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어요. 그렇게 모닝커피를 마시며 작품 이야기를 했는데, 난 그 과정이 너무 좋았어요. 그 사람이 영화에 임하는 철학이 좋았던 거죠. 그와 작품을 쭉 하면서, 작품의 성패와 상관 없이 서로의 지식과 아이디어로 발전하는 상승 작용이 있었다고 봐요. 하나의 대인관계로부터 그 이상 만족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 <화녀> 장면표 “내가 탄복한 것은 김기영의 ‘유머’예요. 그는 영화에 긴장, 긴장, 긴장을 이렇게 하나씩 쌓아가다 유머러스한 신을 들여요. 그러면 관객도 한 박자 쉬었다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포즈’(pause)란 말이죠. 영화에 여유가 있는 거예요. 그 점이 그가 가진 참 좋은 재료인데, 이 사회를 그만큼 희극적으로 바라보는 거죠. 그래서 지난해 말 개봉한 <서울의 봄>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만약 김기영이 정치 영화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봤어요. 시대를 비판하면서도 곳곳에 유머를 숨겨뒀을 겁니다.” * <이어도> 콘티북 “<이어도>는 노 개런티로 찍고, 흥행이 되었을 때 돈을 나눠 받는 조건으로 촬영했어요. 영화에 돈을 쏟는 대신 식비를 아끼자, 나는 라면을 먹어도 괜찮다, 스탭들도 설득하겠다고 했죠. 제주도로 촬영을 갔더니 식생활이 정말 열악했어요. 매일 똑같은 밥과 반찬에 심신이 아주 피곤했죠. 당시 숙소도 모두 흩어져 있었는데, 아침 일찍 감독님 숙소로 딱 갔더니 고기 굽는 냄새가 나데요? (웃음) 내가 화가 나서 이 영화 관두겠다고 서울로 가버렸어요. 그렇게 서울에 이틀 있었는데, 김 감독이 따라왔어요. 치즈가 귀할 때인데, 남대문 시장에서 큰 치즈를 하나 사왔더군요. 그러면서 나한테 “정 박사, 내 체구가 2m에 80kg이 넘는데, 일주일에 고기 두 번 안 먹으면 쓰러져요. 미안한 줄 알면서도 촬영을 버텨내려고 고기를 먹었는데 이해해주면 좋겠어요”라는 거예요. 그 이야길 들으니 측은하더라고요. 나도 무책임하게 서울로 와버린 것에 대해 사과하고 제주로 돌아갔죠. 그렇게 <이어도>를 찍으면서 김기영 감독이 내게 요구한 건 거칠면서도 정교하고, 정교하면서도 거친 화면이에요. 정석적인 촬영을 벗어나 카메라를 흔들면서 찍었죠.” <문>(1977), 기다림의 예술* <문> 시나리오 “<문>은 애초에 일본과 합작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나는 깊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본 로케이션까지 무산되니 유현목 감독이 절망에 빠졌었죠. 일본 장면이 어설프게 완성될 수밖에 없었는데, 한라산 백록담 장면도 거기까지 올라가서 촬영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당시 3월이었는데, 계절적으로 눈사태가 가장 많을 때라 여러 사람이 촬영을 말린 모양이에요. 나는 촬영하다가 죽으면 영광 아니겠냐고 했지만 유 감독은 겁이 많았어요. (웃음) 결국 산 정상의 휘어진 나무들을 구현해 나름대로 백록담 세트를 만들어 촬영을 했어요. 그래도 한라산 안개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신은 안개를 기다려가며 일주일 간 찍었어요. 그러니까 영화는 기다림의 예술이에요. 불편함 속에서 예술이 나오거든요. 광선을 기다리고, 계절을 기다리고, 연기자를 기다리고…. 이런 인내 훈련이 영화 외의 삶에도 굉장한 도움이 돼요. 정해진 시간 내에 일하자는 지금의 움직임도 좋지만 단체 예술에는 이런 예외도 생길 수 있다는 게 제 개인의 생각입니다.” <안개마을>(1982)에서 확인한 임권택과의 인연* <안개마을> 시나리오 “임권택 감독과 <만다라>(1981)를 끝내고 재회한 작품이 <안개마을>이거든요. 나는 <만추>(김수용, 1981)를, 임권택 감독은 <아벤고 공수군단>(1982)을 작업하며 둘 다 아주 바쁘던 시기인데, 사정상 <안개마을>을 후반 작업까지 포함해 20일 만에 완성해야 했어요. 그런데 촬영 장소인 마을에 안개가 없는 거예요. 제목이 ‘안개마을’인데 안개가 없다니요! 그래서 스모그를 피워가면서 찍으니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그럼에도 이틀을 계속 찍었는데 하루가 딱 지나니 동네에 안개가 끼는 거예요. 이틀 간 찍은 많은 신을 전부 다 버리고 밤낮으로 다시 찍을 수밖에 없었어요. 촬영은 12일 만에 끝났고, 18일 만에 프린트가 나왔어요. 클로르 를루슈 감독이 열하루 만에 <남과 여>(1966)를 찍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우리나라에선 홍상수 감독이 그러잖아요? 1년 내내 촬영하면서 여러 계절을 표현해야 하는 영화가 있는가하면 그런 패턴의 영화도 있는 거지요. 임권택 감독과 현장에서 얘기를 끊임없이 나눴을 뿐 아니라 그와 <만다라>를 통해 손발을 맞춰왔으니 정신적으로도 잘 융합이 됐고, 그도 나를 인정해준 덕분에 <안개마을>을 빨리 찍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 <아다다> 현장의 정일성 촬영감독과 임권택 감독 “수많은 작품을 하면서 손발이 맞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 작품을 하더라도 잘 맞는 경우가 있죠. 그것은 인연이에요. 이렇게 짧은 시간 작업해도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경험을 계기로 임 감독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출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문헌을 찾아봐야겠지만 30여 년간 한 감독과 촬영감독이 호흡을 맞춘 건 아마 흔치는 않을 거예요. 그와 함께 하는 것은 개인으로서도 기쁜 일이었고요. 하지만 서로가 서로로 인해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을 경계했기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며 작업했죠. 얼마 전에 극장에 가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봤는데, 그 영화를 찍은 스벤 닉비스트 촬영감독이 또 잉마르 베리만 감독과 명콤비였죠. 그 영화를 가만히 다시 보는데 내가 부끄럽더라고요. 나는 그만한 경지에 아직 못 간 것 같아서요. 영화가 끝났는데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언제 또 그렇게 숨 막히는 영화를 볼 수 있을까요? 미국 영화의 아류가 아닌, 한국의 역사를 세계적인 소재로 풀어내는 우리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현장 리포트에 새긴 <서편제>(1993)* <서편제> 촬영현장 리포트 “나는 국악에 문외한이었어요. TV에 판소리가 나오면 지루해 채널을 돌렸죠. 그런데 그 소리가 나오기까지 맺힌 우리나라 여성들의 한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억울함, 그리고 우리의 정치적인 억울함이 담긴 문화를 몰랐다는 부끄러움이 일더라고요. 그런 마음들이 구체화된 것이 판소리인데, 판소리가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성공한 사례가 바로 영화 <서편제>가 아니었나 싶어요. 임권택 감독의 공이죠. ‘<서편제> 촬영현장 리포트’라고 이름 붙은 이 기록은 내가 바라본 <서편제>를 쓴 거예요. 촬영감독으로서 카메라를 통해 본 현장을 남기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쓴 건데, 어디에 게재됐던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임 감독과 로케이션 헌팅한 이야기부터 촬영하는 동안 생긴 일도 적었죠. 내 나름대로 영화를 찍기 전 원칙을 세워요. 첫째는 리얼리즘, 둘째는 모더니즘, 셋째가 격조예요. 영화의 격조는 감독과 의논해가며 만들어가는 거죠. 그게 없으면 영화가 아무리 사실적이어도 삼류로 전락하고 말아요. 소리를 시각 이미지로 담아내겠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감독과 커뮤니케이션한 기록이 여기 적혀있습니다.” 아래는 그 기록의 일부. “현장에서 판소리를 들어가며 촬영한 첫 작업에서는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 또한 한여름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알콜 불을 이용하여 지열을 묘사하는 시도도 표기해야 했다. 촬영 현장이 바닷가였고 지형상 계속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을 남긴 채 첫 여름장면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원작을 다시 꼼꼼히 읽었다. 다음 촬영까지 시나리오 작업과 헌팅을 위한 시간 여유가 어느 정도 있었다. 원작의 느낌을 몸에 익히면서, 판소리의 세계에 접근하려 노력했다. 호남 일대를 도는 헌팅과정에서 조상현씨가 부른 춘향가 완창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며 판소리의 깊이와 넓이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공간 협조. 히도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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