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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감독들의 기억 속 영화들 2024.12.20 804
틈: 감독들의 기억 속 영화들
<틈: Film in the Gap> 상영작 감독들은 어떤 한국영화에 영향을 받았을까

편집: 남선우(씨네21)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는 틈새에서부터 새해를 시작해본다. 지난 해 개봉관이나 OTT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영화들, 미술관 전시장과 영화제를 먼저 찾은 작품들, 그렇게 자신만의 구석을 확보해 특유의 색채를 펼친 열 네 편의 상영작을 <틈: Film in the Gap> 기획전에 모았다. 모두 예리한 시선으로 세상의 응달을 지켜보고, 그곳에만 부는 바람을 포착한 영화들이다. 새 영화의 그늘에 앉아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기 전에, 이번 기획전의 부름을 받은 감독들에게 물었다. 그들에게 영향을 준 한국영화는 무엇인지. <아카이뷰>가 내건 조건은 한 가지. 세상에 나온 지 스무 해 이상이 지난, 새로운 고전으로 불려 마땅한 작품을 꼽아달라는 것. 요청에 응답한 안건형, 오민욱, 조희영, 황슬기, 허범욱 감독이 오랜 기억을 더듬어 영화와의 추억을 들려줬다.  그 풍경이 어떻게 그들만의 스크린에 재구성되었는지는 시네마테크KOFA에서 마저 확인하시기를. 


 

<자매의 화원>

<일과 날> 안건형 감독이 말하는

<자매의 화원>(1959)

<자매의 화원>은 신상옥의 1959년 영화다. 무언가를 대표하는 영화는 아니다. 감독은 영화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그는 뚜렷한 주제의 영화들을 자랑스러워 했는데 이 영화는 그만큼 단단하지 않다. 신상옥은 거대함의 감독이었다. 영화에는 전투기가 날고 대괴수가 쓰러진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도 아니다. 감독의 외면이 부당하지만은 않다. 상이한 연애이야기가 접합됐는데, 전반부가 두 자매와 두 남성의 결혼이 엇갈리는 내용이라면, 후반부는 동생 내외가 물러나며 <장한몽>식 삼각관계가 대신한다. 좋게 평가하기 힘든 스토리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라는 분류 틀이 필요할 때 비로소 언급된다. 하지만 더 빨랐던 <어느 여대생의 고백>, 더 높은 성취의 <동심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비해 더 주목되진 않는다. 이 영화는 특출난 게 없는 범상한 영화다.
나는 <자매의 화원>을 생각하면 이런 게 떠오른다. 묘지 위로 어둡게 서있는 북한산, 석양의 마포 강변과 당인리발전소의 검은 연기, 새롭게 올라가는 한양대 교사 앞으로 (<지옥화>에서 허우적대던 늪지가 잠겨) 반짝이는 강물이 넘실대는 중랑천. 특정 장소가 만들어낸 낭만적 이미지는 멜로드라마에 기여하는 만큼이나 현실감으로 그 판타지를 방해한다. 그런 개별 이미지들은 어떻게 분류될 수가 없고, 그래서 비교되지도 대표될 수도 없다. 장소의 고유함이 식별될 때만 일어나는 일이다. 이게 내가 <자매의 화원>을 좋아하는 이유다.

 
 

<강원도의 힘> 스틸이미지

<산산조각 난 해> 오민욱 감독이 말하는

<강원도의 힘>(1998)

홍상수의 두 번째 장편영화 <강원도의 힘>을 열고 있는 두 개의 샷을 떠올려본다. 창밖을 응시하는 남자의 뒷모습, 흔들리는 열차의 통로에 버티고 선 여자의 늘어진 표정, 수면의 상태를 청하거나, 그 상태에 이미 이른 사람들, 그리고 열차의 좌석을 잡아 누르는 (카메라에 의해)절단된 신체. 좁은 공간 속에서 피사체 사이의 균형을 침범하지 않는 인상을 풍기는 이 장면들은 이후 내가 카메라로 무언가를 향하며 작업하는 동안, 이따금 균열의 정서를 품은 채 다가오곤 했다. 공공장소에 운집해 어디론가 흐르는 인파, 제의와 기념의 무대를 위해 약속된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 무엇인가 부서지고 무너진 자리를 오가는 그림자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할 때 촬영의 필요에 균열을 내며, 이야기를 등지고, 사건을 비켜서고, 인물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어서였다.
다시 한 번 <강원도의 힘>을 열고 있는 두 개의 샷을 떠올려본다. 어둠 속을 달리는 좁은 열차의 통로에서 카메라를 등지고 선 남자가 응시하던 것은 창밖을 스치고 지나는 어둠이었을까? 아니면 어둠이 비추는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이 균열의 정서는 내게 여전히 공고한 균형으로 남아있다.


  

<버스, 정류장> 스틸이미지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조희영 감독이 말하는

<버스, 정류장>(2002)

20여 년 전 핸드폰에 내장된 전자책 기능을 통해 시나리오들을 담아 두고서 등하굣길에 읽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번지 점프를 하다> <오! 수정> <사랑니> 등 다양한 한국영화의 시나리오가 그 작은 2G폰에 가득했었다. 그 중에서도 <버스, 정류장> 시나리오를 많이 좋아했었다. 영화 또한 루시드폴의 음악과 함께 감춰뒀던 10대의 우울한 정경을 불러온다.
매일이 질서 정연하고 그렇게 엽기적이지도 않은 엇비슷한 하루여서 그걸 다 세면서 자유와 해방의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 수 밖에 없는 학생 신분이었던 나는 소희와 재섭의 비애를 내 것인 양 대했다.
<버스, 정류장>의 영제는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 L’abri >다. ‘피난처’와 같은 의미로 ‘안전하게 보호 받는 곳’을 뜻하는 단어이다. 버스, 정류장은 본래의 목적(귀소할 수 있는)과는 다르게 두 인물에게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함께 진실할 수 있었던 장소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마르크 오제(Marc Augé)가 제안한 관점에서 익명성 아래 정착하지 못하고, 정체성이 부재한 공간인 버스정류장은 비장소(non-lieux)에 속한다. 이는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와 같은 의미로도 호응하는, 개인의 고독을 구체화할 수 있는 장소와 같다.
더불어 영화 곳곳에 새겨진 장소에 대한 묘사가 남긴 깊은 우울을 기억하고 있다. 학원, 버스정류장, 사창가, 지하철 플랫폼, 떡볶이가게, 운전면허시험장, 병원, 편의점 앞 빨간 우체통, 다시 정류장 그리고 버스 안. 모두 머무를 수 없도록 시간이 제한된 장소들이다. 역사성이 존재할 수 없는 비장소의 성격은 영원한 현재를 지칭하기에 재섭과 소희의 버스, 정류장 또한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영원히 정착할 수 없는 곳으로 현재를 비추고 있다.
언제든지 훌쩍 어디든 갈 수 있게 드라이브를 취미로 삼고 싶다던 소희의 말에 면허시험을 준비하던 재섭이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담배를 한 대 피우고서 마침내 시험을 치르는데 안내 방송은 보란 듯이 장내를 쩌렁하게 울리며 재섭의 실격처리를 알린다. 소희에게 드라이브를 선사해 줄 수 없게 된 신세에 그저 좌절하게 될 재섭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재섭이 그토록 혐오하던 어른이란 인간들이 주민등록증 다음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으로도 그 흔하디 흔한 운전면허증을 차마 가질 수도 없는 신세가 된 재섭에게 ‘너는 어른이 안 된 것이 아니라 못 된 것이다, 이 패배자야’ 라는 말로 다르게 울려 퍼졌다. 글을 썼다 지우기만 하는 전후문학에나 살아있을 법한 재섭의 허무주의적 자아는 책을 버리고 거리에 나가자는 테라야마 슈지의 마사루와 같았고, 모순적 사랑을 실천하는 소희는 시나 린조의 ‘천국으로의 원정’에서 다섯명의 남자를 동시에 사랑했던 창녀와 같았다. 이내 살해당하지만 이에 긍지를 느끼며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섹스했던 것으로 자신의 사랑과 모순의 절대성을 알리는 창녀가 원조교제를 하고 임신과 낙태를 겪는 17살의 소희와 겹쳐 보였다. 재섭과 내내 섹스하던 혜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창녀가 재섭이 혐오하지 않은 단 한 명의 유일한 어른이라는 사실 또한 소희의 사랑과 모순의 절대성을 대변하듯 느껴졌다.
애초에 이름 없는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던 것이 편했을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때는 두 사람의 시간이 비로소 합쳐질 때였다. 재섭의 시간이 시작되면 간간히 소희의 시간이 중첩되어 번지고, 다시 소희의 시간이 시작되어 재섭의 시간이 번져갈 때, 소희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재섭의 이름을 물어본다. 그때부터 다르게 흐르던 둘의 시간은 완전히 몸을 합친다. 두 남녀 모두 스스로 자해하고, 사회적 정체성과 거리를 두며 이를 혐오한다. 그들 주변으로는 신물 나도록 사회와 결탁한 그런대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그들의 반항과 자해를 부추길 뿐이다.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비장소적 성격을 구체화하는 고독의 정서는 두고두고 아픈 무질서적 외로움이다. 어쩌면 질서 없는 이 외로움이 깊게 새겨져 불현듯 내 글에도 출현하는 때가 있었을지 모르며 나에게 끊임없는 반항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재섭이 그토록 혐오하던 어른의 나이가 된 내게도 결국 피난처가 생겨버렸고, 피난처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나의 비애가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도록 해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엔트로피가 뭐냐 묻는 학생에게 무질서도를 일러주던 재섭의 외로움은 소희의 것과 함께 계속해서 증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것만 같다.


<집으로> 스틸이미지
 

<홍이> 황슬기 감독이 말하는

<집으로...>(2002)

<집으로...>(이하 <집으로>)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우선 영화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오래된 극장 한 구석에서 <집으로>를 보는 내내 교복 와이셔츠가 흠뻑 젖도록 펑펑 운 기억 밖에 없었다. 울보가 된 기억만으로 글을 쓰자니 쉽지 않았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이 나를 그렇게 울게 했는지 확인하고 싶은 얄팍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집으로> 사이에 22년간의 공백이 쌓이는 동안, 나는 웬만해서는 울지 않는 냉혈한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집으로>는 첫 장면부터 나의 냉소를 와르르 녹이고 다시 울보로 만들고 말았다. 눈물과 콧물 범벅 속에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은 <집으로>에는 많은 것이 없지만, 그 ‘없음’을 뛰어 넘는 마음이 있고, 들키고 싶지 않은 연약함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정말이지 영화 <집으로>의 ‘집’에는 많은 것이 없다. 엄마, 아빠도 없고, 친구도 없고, 깨끗한 화장실도 없고, 그 흔한 배터리도 없고, 온종일 시끄러운 TV도 없다. 갓 튀긴 치킨도 없고, 세상살이에 중요한 돈도 없다. 한 마디로 그 집은 불편한 곳이다. 대신 그 집에는 오직 서로 뿐인 외할머니와 손자가 있다. 더불어 <집으로>는 많은 것이 없는 영화다. 극적인 사건도, 친절한 설명도, 다정하게 주고받는 대사도 없다. 참 불친절한 영화다. 대신 이 영화에는 외할머니와 손자가 나누는 깊고 너른 관계의 흐름이 있고 나는 그 흐름을 대책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외할머니와 보낸 나에게, <집으로>는 함부로 대했던 관계와 처박아 두었던 마음을 불러내어 말없이 어루만지는 영화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한다. ‘미안해, 보고 싶어, 사랑해’를 말로 전하는 대신, 소리 없는 마음이 보여주는 진솔함을 <집으로>는 그린다. 딸이 주고 간 영양제를 아픈 이웃 노인에게 나눠 주는 마음, 초코파이를 두 개 달라고 했는데 네 개를 넘치도록 쥐어 주는 마음, 외할머니가 판 산나물 값이 혼자 먹은 짜장면 값이 되는 걸 보는 마음, 죽기 전에 다시 만나자는 마음, 진심으로 사과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이 <집으로> 에 있다.
이 무수한 마음들은 백 마디 말보다 더욱 강력한 장면이 된다. 누구나 알면서도 쉽게 내놓기는 어려운 마음을 스스럼없이 나누는 순간들이 모인 영화 속 장면들은, 이윽고 외롭고 연약한 존재들이 누구보다 서로의 위안과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전하는 <집으로>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각자 헤어지는 뒷모습들에 이어 <집으로>가 외할머니께 바치는 헌사를 보는 순간, 22년 전 극장에서 내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22년 후 지금의 나 역시 왜 이렇게 울고 있는지 그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뜨거운 눈물의 이유를 따져 묻는 차가운 마음은 <집으로>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연약하고 뾰족한 마음을 보듬는 투박한 손짓,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둥글게 쓸어내리는 부드럽고 단단한 마음이 <집으로>에는 있다.
 

 (좌측부터)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복수는 나의 것> 스틸이미지

<구제역에서 살아돌아온 돼지> 허범욱 감독이 말하는

<살인의 추억>(2003), <지구를 지켜라!>(2003), <복수는 나의 것>(2002)

어릴 적부터 한국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전혀 관심 없었을 정도로. 이 두터운 틀을 깬 건 <살인의 추억>이 시작이었다. 한국 영화가 이렇게 엄청나게 재밌으면서도 훌륭할 수 있구나! 오래전 없어진 신촌의 녹색극장에서 송강호 배우가 화면을 노려보는 마지막 장면의 압도감은 여전히 잊지 못한다. 나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함은 물론이거니와 봉준호 감독이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다녔다는 정보까지 얻게 된, 나에겐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런 이유로 조금의 고민도 없이 <지구를 지켜라!>또한 보게 되었다. 아직 영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2003년의 나에게도 이 영화는 무척이나 신선했다. 어릴 적부터 도스토예프스키, 최서해의 소설과 백석, 기형도의 시를 좋아하던 나였다. 그렇기에 이렇게나 어두운 이야기를 이상한 괴로움과 재미를 적절히 섞어가며 표현하는 것에 나는 열광했다. <지구를 지켜라!>는 그 뒤로 나의 취향에 맞는 수많은 영화를 찾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최대치로 뒤흔들다 못해 영화에 푹 빠지게 만든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운명처럼 보게 되었다. 왜 좋은지, 왜 나를 이토록 미치게 하는지 그 당시에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과 같았다. 행복의 늪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10년. 한국영화아카데미 27기로 영화를 배우고, 첫 장편 애니메이션인 <창백한 얼굴들>을 만들게 되면서 내가 추구하는 작품의 방향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과거에 좋아하던 작품들에서 나도 모르게 배우고 익혀 온 것임을 깨닫는다. <살인의 추억>의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훌륭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의 완성도, <지구를 지켜라!>의 새로운 연출이 주는 자유로움,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의 감정을 폭력과 연결하는 미학. 이 세 가지를 최대한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2024년 6월에 완성한 나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인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도 같은 맥락이다. 비록 제작의 수많은 한계로 인하여 모든 사항을 철저하게 지킬 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나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냈다.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결과는 같을 것임을 안다. 후회는 없다. 다만, 나의 바람은 이 세 편의 한국 영화가 준 깨달음을 더 깊게 지킬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더 있길 바랄 뿐이다. 모든 감독이 그러하듯.